중학교 때였을까. 한 소년이 세상과 자신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는 했다. '왜 공부를 해야 하지?' 


  왜 축구를 하지? 재미있으니까. 왜 농구를 하지? 재미있으니까. 왜 컴퓨터 게임을 하지? 재미있으니까. 그러나 공부는 왜 하는지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없었다. 공부가 축구나 농구처럼 재미있는 활동으로 느껴졌다면 그것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했을 것이다. 지금은 공부가 충분히 재미있는 활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강요된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금지된 것은 더 가지려 하고 강요 받은 것은 일단 피하려 하기 마련이다.  

 

  공부를 잘 해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으며, 그래야 부족함 없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나의 청년기와 중, 장년기, 그리고 노년기가 소중하듯이 나의 청소년기도 소중한 것이었다. 나는 현재도 행복하고 미래에도 행복해야 한다. 지금 불행하면 미래에는 행복하고 지금 행복하면 미래에는 불행해진다는 논리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누구 마음대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논리를 나에게 강요하는 것은 부당했다. 정말로 공부를 잘 하면 미래에 행복해질지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사실상 공부를 못하면 불행해질 것이라는 위협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위험하고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만 하는 험난한 곳이어야만 하는 것일까? 누가 그렇게 정해 놓은 것일까?


  의사라든지 판사라든지 그런 존경받고 높은 지위를 누리며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당시 그러한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일을 하면서 살 경우,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이 들고, 어떤 재미와 흥미, 혹은 어려움을 느끼게 될지 거의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그 직업이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직업으로서 안정적이며 높은 지위를 누린다는 이유만으로 그 직업을 갖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존경이나 높은 평가는 그들의 생각이지 나의 판단은 아니었다. 나는 나의 가슴을 움직이는 그런 일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또한 성적이 최상위권인 학생들은 왜 의사나 판검사가 되려고 하는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그것이 정말 그들의 생각이고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일까? 만약 최상위권 학생들이 판검사가 아닌 철학자, 의사가 아닌 공학자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에서 그들이 태어났다면, 그래도 그들은 의사나 판검사가 되고자 했을까? 지금이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라면 그들의 선택은 어떠했을까?


  자의적이었다. 규칙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게임의 규칙을 누가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물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들은 게임에서 이겼을 때의 보상과 패배자가 되었을 때의 처벌에 대한 것들이었다. 애초에 나의 동의를 생략해 버렸다는 점에서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그 규칙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이상했다. 이유를 댈 수 없는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것도 집단적으로 말이다. 옆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친구는 공부를 해야 하는 납득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아니면 그 이유에 답변하는 것을 생략한 채 암묵적으로 게임의 규칙에 동의를 해버린 것일까? 정말 이상했다. 누구도 나를 설득시키지는 못햇다. 


  공부를 잘 하지 못했을 때의 위협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런 대학에 가고, 그저 그런 직장에 다니면서 별 재미없는 인생을 살게 되거나 그마저도 못하고 비참한 생을 살게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우리 부모 세대들은 우리의 미래를 염려하면서 공부를 잘 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가진 것, 배운 것이 없어 피할 수 없었던 숱한 고생과 눈물, 한들을 자녀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든다. 그들은 자녀들을 염려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고생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닌가? 자신들의 고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인정 받고 싶은 것은 아닌가? 자신이 살아 온 환경은 생존하기조차 힘든 험난한 곳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해서 자신의 삶이 고난과 고생으로 가득 찬 것은 필연이었음을 인정받으면서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몰고 오는 허무함과 공허감을 피하려는 것은 아닌가? 정말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가능성도 있었다고 억지스럽게 가정해보자. 지금보다 좀 덜 풍요롭더라도 더 평등하고 더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에 뜻을 모을 수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면서 이 세상을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만들지 못한 책임,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지 못한 책임을 회피하는 셈이 된다. 왜 그 책임을 성적 안 좋은 아이가 짊어져야 할까? 공부 못하면 불행해져야 하나? 정말 현실이 그러한가? 이상하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공부를 잘 하든 못하든 행복하게 살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왜 공부를 해야하지?' 이 질문은 모습을 바꾸어 다시 나의 삶에 출현한다. 왜 돈을 벌어야 하지? 왜 취직을 해야 하지? 내가 이상한 것인지, 혹은 나만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행동, 교육, 제도, 상식, 규범들을 당연한 것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인 것 같다. 나는 그 무엇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쪽인 것 같다.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고 가치관이다. 무엇이 당연한 것일까? 무엇을 당연하게 여기는가, 이것이 가치관과 세계관의 다른 표현이자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재미있는 일을 할 때는 그 일을 하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 과정 자체가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타인에게서 목적을 빌려온다. 그리고 과정의 중요성은 무시된다. 무엇인가 맹목적이고 앞뒤가 뒤바뀐 사회, 나는 그런 사회를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사회에 살고 있는 나는 쉽게 불행해지려 하지 말자. 나의 불행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정당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 쉽게 불행해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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