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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7 『고삐 풀린 자본주의』 앤드류 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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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글린 지음, 김수행 정상준 옮김, 『고삐 풀린 자본주의』, 필맥, 2008
'왜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주중에는 일을 하는 데에 가장 긴 시간을 쓴다. 밥을 먹고, 옷을 사 입고, 쉴 곳을 구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한다. 그리고 돈을 버는 과정에는 경쟁이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생존만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생존과 관계 없는 것들에도 돈을 쓴다. 사치품을 사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고 있는 경쟁도 연극에 불과한 것일까?
어느 한 쪽이 옳다고 쉽게 선택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나는 나를 둘러싼 상황이 조금 덜 경쟁적이라면, 예를 들어 취업하기가 더 수월해진다면, 근무시간이 줄어든다면, 휴가를 더 많이 쓸 수 있거나 휴일이 늘어난다면, 업무 강도가 약해진다면, 영세 사업자가 되거나 소기업에 근무해도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게 살 수 있다면, 나의 마음이 좀더 여유롭고 편안해지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만약 앞으로 경쟁의 강도가 지금보다 더 세진다면 나의 마음은 더 팍팍해질 것 같다. 그렇다면 과거에 비해 지금은 어떤가? 예전보다 더 경쟁의 강도가 세짐으로써 내가 필요 이상으로 여유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작은 단서라도 찾고 싶은 마음에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대학 때 경제학 수업에서 강의 교재로 쓰였던 책이었다.
저자는 1980년 이후 주요 선진국 경제의 흐름을 서술하고 있다. 책의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시장 친화적인 자본주의로의 변화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7개의 장이 있는데 1장에서 6장까지는 1980년대 이후 나라 간의 경제적 관계, 경제 성장률, 생산성, 노동자의 지위와 임금과 근로조건, 그리고 국가의 경제 정책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를 짚어보고 있다. 7장에서 저자는 경제 환경에서 시장의 힘이 더욱 커지더라도 우리가 어떤 정치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활은 여전히 달라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경제적 변화를 흔히들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 같다. 이러한 변화로 우리가 겪어야 하는 경쟁이 더 치열해진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경쟁이 심해진 그 과정도 유용하다고 생각하지만 왜 그러한 과정을 밝을 수밖에 없었는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저자는 그 변화의 원인에 크게 중점을 두어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저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듯 과정을 전달한다.
아래에서는 각 장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 후, 인상에 남았던 부분들을 발췌하면서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들과 질문들을 적었다.
1장 자본에 대한 도전들
1장에서는 1980년대 이전까지의 상황들을 정리하고 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말까지 선진국 경제는 잘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대 말부터 심상치 않은 현상들이 나타났다. 실업률이 낮게 유지되면서 노동자계급의 세력이 강화됐다. 임금 또한 크게 상승했다. 제조업의 이윤몫(추측컨데, 제품을 만들어 팔고 남은 수익 중에서 임금을 뺀 몫, 즉, 기업이 이윤으로 챙겨가는 몫인 듯)이 떨어졌다. 유럽과 일본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국제경제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또한 원유를 비롯한 원자재의 가격이 올랐다. 임금의 상승과 원자재 가격의 상승은 인플레이션율도 상승시켰다. 생산성 증가율도 둔화되었다. 거시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수요증가율도 하락했다. 게다가 그때까지는 대안의 체제라 할 수 있는 소련 및 동유럽도 그럭저럭 나아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보였다. 그러나 2000년까지 이러한 위험요소들은 격퇴되었다.
이렇게 걷보기에는 서로 관계가 없는 듯한 문제들에 공통된 문제는 바로 '황금시대'의 성공이 그 자신의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 같다는 점이었다. 황금시대의 완전고용은 노동자 계급의 세력을 강화했고, 에너지를 비롯한 원자재에 대한 수요는 가능한 공급량에 비해 과다해졌으며, 유럽과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는 과정이 국제경제 관계를 파열시키고 있었다. 기존의 기술이 지닌 잠재력의 고갈은 생산성 증가세를 위축시키는 듯했다. 더구나 소련을 비롯한 계획경제 국가들이 여전히 자체적으로 심각한 경제적 문제점을 안고 있긴 했지만, 그런 나라들이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유시장 자본주의와는 다른 대안적인 경제발전의 경로가 가능하다는 기대가 유지될 수 있었다. (p.18~19)
1장의 내용이 위 인용문에 잘 정리가 되어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가 발전한다. 그 발전이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를 낳는다. 자본주의는 발전을 할수록 스스로 자신의 존립을 위협할 요소를 낳는다는 이야기를 마르크스가 했던 것 같다.
노동공급이 부족한 노동시장, 노동조합의 전투성, 1차산품의 가격상승, 인플레이션, 이윤압박, 그리고 심지어는 생산성 증가율의 둔화와 국제금융체제의 불안정성까지도 강력한 자본축적의 활기 넘치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중략)...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또한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도전들의 전조이고, 심하게는 그런 도전들을 되레 자극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p.37)
대략 1960년대 말부터 위와 같은 위협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금융시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은 앞에서 논의한 모든 것(노사갈등이 야기한 불확실성, 인플레이션율의 상승, 이윤압박, 생산성 증가의 둔화, 국제경제의 혼란, 노사갈등, 그리고 산업에 더 깊이 개입하겠다는 국가의 위협)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2000년까지는 주가가 이전의 하락폭을 거의 만회했고, 파업이 무의미할 정도로 줄어들었고, 물가상승이 억제되는 가운데 실질임금도 위협적이지 않을 정도로만 소폭 올랐을 뿐이고, 이윤이 현저하게 회복됐다. 1차산품과 석유의 가격은 실질치로 볼 때 1960년대에 비해 크게 높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떨어졌고, 달러가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유로통화지역이라는 환율이 안정된 지역이 형성되고 있었으며, 정부지출의 증가는 멈췄다. 소련은 국가소유의 중앙집중적 계획에 입각한 경제체제와 더불어 붕괴했고, 사적 자본의 지배를 위협하는 급진적인 조치들은 폐기됐다. 아래에 이어질 장들에서 자세히 논의할 새로운 위협들이 머지않아 등장하게 되지만, 2000년까지는 1970년대의 도전들이 결정적으로 격퇴된 것으로 보였다. 이어지는 4개의 장에서는 이처럼 자본주의의 힘과 안정이 결정적으로 회복되는 데 기여한 핵심적인 요소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필 것이다. 2장에서는 정부정책의 극적인 전환을 조명하고, 이어 금융부문의 힘이 커지고 주주의 이익이 기업의 운영을 지배하게 된 점을 분석할 것이다.(p. 46~48)
70년대 후반의 자본가들은 위협을 느꼈을 것 같다. 생산성은 떨어지고, 수익성도 떨어지고, 임금은 높아지고, 노조는 강하고, 국제 경제관계는 혼란스러웠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2000년대까지 상황은 반전되었다. 자본가들이 힘을 발휘한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2장 긴축, 민영화, 규제완화
2장에서는 정부정책이 변환된 점에 대해 다룬다. 1970년대 중반, 실업률이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979년 말에 이자율을 올렸다. 실업률은 더욱 올랐고 인플레이션율은 하락했다. 재정적자를 감축하기 위한 시도도 행해졌다. 주요 선진국들에서 국영산업이 민영화되었다. 국가가 제공하던 서비스를 민간부문에 아웃소싱하는 비율이 늘어났으며 노동시장의 규제가 완화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 거의 모든 OECD회원국에서 실업률이 상승한 것은 앞장에서 본 인플레이션, 유가상승, 이윤압박, 노사관계의 불안 등이 총수요와 기업가의 기대에 충격을 가한 탓이라고 일단 설명할 수 있다. (p.50)
일단 1970년대가 되자 실업률이 상승했다. 1장에서 논의한 위험요소들이 수요를 감소시키고 기업가의 투자를 위축시켰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총수요가 부족할 때에는 일시적으로 재정적자를 낸다는 케인스주의적 처방은 복지국가의 자금조달에 대한 장기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복지국가가 가장 폭넓게 발전한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의 경우에는 정부가 상당한 재정흑자를 내고 그것을 재원으로 삼아 민간부문에 대출을 해주었다. (p.62)
나는 '케인스주의=재정 지출의 확대=복지 지출의 확대=좀 더 평등주의적인 경제학파'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 문단에서 저자는 케인스주의의 핵심은 이 등식을 지향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총수요 부족으로 경제가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정부는 일시적으로 재정적자를 냄으로써 수요를 발생시키고 이를 동력으로 경기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이 케인스주의의 핵심이다. 이는 평등의 이념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케인스주의적 처방은 위기상황에서 쓸 수 있는 '비상약'이지 복지국가의 유지를 위한 '영양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불어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의 재정 흑자에 대한 얘기는 흥미롭다. 나는 복지지출을 많이 하면 국가 재정이 궁핍해질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은 어떻게 복지 예산을 마련하고 운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기대했던 경제성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재정적자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우리만치 확대되면 공화당은 사회복지 지출을 강제로 감축하는 편리한 시나리오를 내놓을 요량이었다. (p.67)
나는 경기가 침체되면 정부지출을 확대하거나 세금을 깍아주기 때문에 정부 재정 적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즈음의 미국의 경제 정책에 관한 뉴스를 들으면 좀 생소하다. 미국의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치인들은 정부의 재정 적자 감소를 위해 복지 지출을 축소하는 방안에 대해 이야기한다. 뭘까, 이건? 정부의 빚이 워낙 많기 때문일까? 복지 지출을 줄이면 사람들은 더욱 소비를 줄일 것이고 경기는 더욱 침체될 텐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복지 지출의 축소를 운운하는 것은 대체 무얼까? .
OECD회원국에서 진행된 민영화는 처음에는 강경우파 정부(대처 정부가 그 대표적인 예다)의 과격한 정책이었지만, 십 년 안팎의 세월이 지나자 좌파 정부에서도 통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됐다. (p. 75)
토니 블레어 총리 재임 시절의 영국 정부가 내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분명 집권 여당이 '노동당'이라는데 왜 저렇지? 어떨 때는 오히려 더 보수적인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당 간의 차이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쇼에 불과한 것일까? 사람들은 알면서 속든 모르면서 속든 정당 정치에 그저 속기만 하는 것일까?
이는 모든 사람이 소득이나 장래 전망과 상관없이 남부럽지 않게 그런 서비스를 누릴 수 있어야 하고, 대중이 건강하고 교육을 잘 받으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평등주의 사상이 반영된 결과다. (p.80)
인상에 남는 문장이다. 평등에 대해서 다시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평등을 '우리는 똑같은 시민이므로 똑같이 나누자'라는 의미로 이해하기에는 좀 부족한 면이 있다. 이런 의미로 평등을 이해하게 되면 평등은 너무 단순하고 무식하며 획일적인 사상이 되어 버린다. 위 인용문에서 말하고 있듯 평등은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며 입체적이다. 당신이 혜택을 받으면 나도 그 혜택을 간접적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간접적인 혜택은 여러 사람이 공유하므로 그 효과가 크다. 위 인용문에 의하면 평등은 '당신이 잘 되어야 나도 잘 될 수 있다', 혹은 '당신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과 인간이 서로 의존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3장 금융과 주주의 소유권
3장에서는 금융 자유화로 인한 금융 위기, 아시아의 통화 위기, 주주 자본주의의 폐단 등을 다룬다. 금융부분의 성장했고 특히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빌린 돈으로 소비를 증가시켰다. 주주가치가 강조되고 금융기관이 소유한 주식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주가를 올리라는 압력이 경영진들에게 더 강하게 가해졌다. 또한 경영진에게 스톡옵션과 같은 인센티브를 주자, 경영진은 단기이윤을 늘리기 위해 비용을 감축해려 했고 이를 위해 고용을 줄였다. 금융부분에 대한 규제가 약화되고 파생상품과 같은 정교하면서도 전체 경제 시스템에 대한 파급력이 큰 상품들이 큰 규모로 거래되면서 금융 불안정성이 커졌다. 이 장에서는 롱텀캐피탈메니지먼트(헤지펀드)의 몰락 사례를 다룬다. 국제적인 금융의 흐름이 증대되면서 환율의 변동폭이 커지고, 국제적인 금융위기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를 비롯한 아시아의 경제 위기와 그 진행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유달리 소비의 증가가 실질소득의 증가에 매우 가깝게 국한되고 있다. (p. 93)
미국과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저축률이 하락하면서 소비가 증가했으나 프랑스와 독일만은 예외였다는 것이다. 소위 '국민성'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는 것인가?
브레턴우즈 체제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환율이 달러에 고정됐고, '근본적인 불균형'의 상황에 처한 경우에만 평가절하가 허용됐다. 국제수지 중 경상수지 항목은 대체로 국내정책이 대응해야 하는 일종의 제약으로 간주됐고, 경상수지 적자가 나더라도 그 규모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각국의 투자는 그 나라 저축의 수준에 의해 제한됐다.(p.112)
브레턴우즈 체제, 그리고 금 태환에 대해서는 좀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아래 글도 참조.(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57&contents_id=39223 참조)
아시아 경제들은 위기 이후에 총생산의 대폭적인 감소를 겪었지만 대개는 그 뒤에 빠르게 회복됐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낮아진 성장률이 결코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지 못했고, 실업률도 위기 이전의 수준보다 1%포인트 높은 상태로 유지됐다. 인도네시아의 경우에는 금융위기가 본격적인 정치적, 사회적 위기로 발전해 그 결과가 훨씬 더 참혹했다.(p.126)
높아진 실업률은 일반 시민들의 고통을 의미한다. 우리나라가 회복이 늦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3장에서 저자는 거대해지고 자유로워진 금융자본이 실물경제를 압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돈은 경제활동의 수단이었다. 돈은 물물교환을 위해 물건을 들고 다녀야 하는 수고를 덜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돈의 흐름이 외환시장을 마비시키고, 회사를 망하게 하고,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만들 수도 있게 되었다.
4장 세계화와 국제경제관계
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여겨진 미국이 해외에서 빌린 돈으로 소비를 부양시켜 왔음을 지적한다. 중국의 경제 성장은 세계 경제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장에서는 미국의 모순적인 처지, 즉 선진국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성장했지만 막대한 금액의 해외차입에 의해 소비를 유지해온 미국의 처지를 고찰했다. 중국경제의 남다른 성장 또한 간단히 살펴보았고, 그것이 세계무역의 패턴에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도 이야기했다. 선진국 경제들 사이의 국제적 통합은 그 정도가 산업별로 천차만별하며, 그 한쪽 끝에는 경쟁이 치열한 전자제품 제조업이 있고 반대쪽 끝에는 미용 서비스업이 있다. (p. 166)
나보다 훨씬 훌륭하게 4장 말미에 요약을 해 놓으셨다.
5장 노동자계급의 후퇴
유럽에서는 1980년대~1990년대까지 노동 강도가 상승했다고 볼 수 있다. 실질임금은 매우 느리게 증가했다. 임금분포에서 격차가 더 커졌다. 노조 가입률이 하락하고 노동조합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미국과 영국 같은 자유주의적 나라들에서 유럽에서보다 노동자의 지위가 더 약화되었다.
스웨덴은 유럽 나라들 중에서 1979년 이후 노동시간이 단축되지 않은 예외적인 나라인데, 이는 애초부터 노동시간이 무척 짧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럽 나라에서는 노동시간이 계속 감소했는데 미국에서는 노동시간의 단축이 사실상 중단됐다는 점은 매우 대조적이다. (p.180)
스웨덴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미국은 도대체 어떤 나리인가? 이러한 차이가 왜 나타나는 것일까? 그 이유가 궁금하다. 그리고 이 두 국가 사이에서 우리는 어디에 위치해 있고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가?
그러나 1979년 이후에는 노동시장이 과잉공급의 느슨한 상태가 됐고, 공업에서 일자리를 잃은 미숙련 노동자들이 저임금의 서비스업으로 가거나, 실업자가 되거나, 노동인력으로부터 탈락하기까지 했다. 여성의 고용기회는 개선됐지만, 여성이 진출한 일자리 가운데 다수는 아직 보수가 낮다. 평균임금의 상승은 실질임금으로 보면 그 속도가 매우 느렸다. 임금분포의 최고층은 중간층에 비해 임금상승폭이 매우 큰 경향을 보였다. 노동강도가 대체로 높아졌고, 고용보호법(특히 임시직에 관한 고용보호 법규)은 축소됐다.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을 빼면 노조조직률은 크게 저하했다. (p.199)
노동 부문에서 일어난 변화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IMF 이후 우리나라의 노동환경 변화도 이와 비슷했을까?
이 모든 것은 노동자계급의 큰 후퇴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1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기업운영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하기 위한 요구는 포기됐고, 기본적인 고용조건과 노동조건을 유지한다는 방어적인 쪽으로 노동자계급의 입장이 전환됐다. (p.200)
나는 오히려 노조가 기업경영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었다는 점이 낯설다. 감히 그래도 되는 건가? 과거에는 지금과 똑같지는 않았던 것인가?
6장 성장과 안정
5장까지 논의한 이런 조치들이 적절한 것이었다면 선진국들의 성장률이 나아졌어야 하지만 성장률은 상승하지 못했다. 미국의 호황은 주로 도소매업의 생산성 증가와 소비증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은 장기 불황을 겪었고 유럽의 경제도 미약하게만 성장해 왔다. 중국을 비롯한 개도국들의 성장으로 선진국의 생활수준 향상이 제한될 것이다.
일본의 불황이 장기화된 것은 일본의 금융시스템이 '무수익성(non-performing)' 대출에서 일어난 손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으면서 파산한 고객기업의 담보물을 처분하기를 꺼렸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종종 제기됐다. 이는 은행들이 손실을 내더라도 그런 담보물을 신속하게 처분했다면 경기후퇴가 더 심각해지고 실업률이 급등했겠지만 이와 동시에 붐이 일으킨 과다한 거품이 시스템에서 더 빨리 '제거'되어 우울한 전망이 뿌리내리기 전에 경기회복이 촉진됐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는 맞는 구석도 있지만, 일본의 장기불황 문제를 놓고 금융자유화의 미진함을 탓하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자산거품을 부풀렸다가 터뜨린 투기행위를 애당초 부추겨 말썽을 일으킨 주범은 다름아닌 금융자유화, 즉 전통적인 금융시스템에 대한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이러한 '국내' 문제는 그 뒤 엔화의 과대평가를 뒷받침한 국제 자본흐름에 의해 더욱 악화됐다. 그러나 강경한 자유시장주의 분석의 특징은, 자유화가 바라는 효과를 내지 않으면 그 이유는 항상 자유화가 소극적으로 추진되기 때문이고, 따라서 해결책은 자유화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p.220)
여기서는 저자가 상당히 열을 내고 있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나도 상당히 열이 난다. 금융부문에 대한 규제 완화로 인해 부동산 거품이 커졌고 이로 인해 일본의 경기 침체가 일어났다. 그런데 강경한 자유주의자들은 규제완화가 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경기침체가 장기화됐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IMF에 대한 기억이 있다. 당시 뉴스를 접할 때마다 상당히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당시의 외환위기는 금융부분과 국제적 자본 흐름에 대한 규제 완화때문에 일어났다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처방으로 IMF가 제시한 것은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한 일련의 규제완화였다. 이에 따라 고용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고 실업자가 늘었으며 경기침체가 더욱 가속화 되었고 고통받는 시민들에 대한 좋지 않은 뉴스들이 많아졌다.
추위에 많이 노출된 사람일수록 감기에 덜 걸린다는 연구결과가 발표 되었다고 치자 (실제 어린 시절에 추위에 노출이 많이 될 수록 감기에 덜 걸린다는 뉴스를 언젠가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의사가 이 연구 논문을 읽은 후, 한 감기 환자가 찾아왔다. 그 환자는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옷을 두껍게 입고 다니지 않아서 감기에 걸린 것이었다. 그 의사는 얼마 전에 읽은 논문을 상기하며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렷다. "추위에 대한 적응력이 약해서 그런 것이니 옷을 더 춥게 입고 다니세요.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의사가 읽은 논문에 의하면 맞는 구석도 없지는 않다. 그런데 이 처방은 두 가지 차원에서 우리의 상식에서는 벗어나 있다. 첫째, 의사는 문제의 원인을 해결책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그 논문이 옳다 하더라도 이 상황에서 '얇은 옷'은 문제의 원인이며, '약을 먹으면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편히 쉬라'는 처방이 상식적으로 맞다. 두 번째는 신뢰의 문제다. 환자가 정말로 그 처방을 따랐을 경우, 환자의 병세가 악회되거나 심한 경우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의사에게 환자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위와 같은 처방을 함부로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의사는 환자의 안위에 과연 관심이 있는 것인지, 환자의 병은 자신과는 상관 없는 '남의 일'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받을 만하다.
IMF의 처방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들은 우리 시민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더구나 그들의 처방이 '옳고 검증된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리고 IMF의 처방을 그대로 따르는 정책 담당자나 이를 비판 없이 보도하는 언론도 '잔인한 의사'와 별반 다를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안위를 위해 상식을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할 의무가 있다. 상식과 올바른 의식을 가지고 깨어 있지 않으면,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든 상품시장에 대한 규제든 여전히 미국보다 유럽에 더 많다는 점에서 유럽이 규제완화를 더 많이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얼마든지 가능한데, 이런 주장은 앞에서 일본의 금융에 대해 논의했던 내용을 삳기시킨다. 그러나 규제가 근본적인 문제라면 상당한 규모의 규제완화가 이미 실행됐으니 노동생산성 증가에 대한 규제완화의 긍정적인 효과가 진작 나타났어야 했다. 다시 말해 유럽에서 규제완화가 생산성 증가의 가속화에 기여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산성 증가율이 하락했다. 규제가 이미 감축돼 왔는데 어떻게 해서 규제가 유럽경제를 침체하게 만든 근원이었다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노릇이다. (p.222~223)
유럽의 경제 성장에 대해서도 같은 논의가 반복 될 수 있다. 유럽의 경제에 상당한 규제 완화가 이루어졌는데 기대한 만큼의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원인이 규제완화가 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이 옳다면 규제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국가에서는 생산성 향상은 커녕 생산성이 더 줄었어야 했을텐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는가? 규제완화가 그렇게 잘 되었다는 미국은 지금 도대체 어떤 상태인가? (이것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미국은 도대체 지금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미국의 상태를 어떻게 해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지?)
...1990년대 중반부터 유럽과 미국 사이에 생겨난 생산성 실적의 격차가 대부분 도소매업에서 나왔다는 점이다.(p.223)
유럽보다 미국에서 생산성 증가율이 더 높았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차이점은 미국의 소비증가율이 훨씬 더 높았다는 것이다.(p.224)
90년대 미국의 호황은 소비진작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다. 추측컨데, 미국내 소비의 증가가 근로자들의 임금 상승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부채에 의한 것일 테다. 현재 미국 경기 침체의 원인은 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야 하는 것인가? 미국에서 가계대출에 대한 규제의 정도는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미국에서 평균 가계부채의 양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이를 유럽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더군다나 영국을 예외로 하면 유럽 나라들은 미국과 같이 강한 소비경기의 붐을 만나지 못했으므로 도소매 부문에 대한 투자가 자극될 기회 또한 갖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기업의 투자를 전체적으로 미약하게 만들었다. (p. 226)
유럽은 미국만큼 소비의 진작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미국만큼 도소매업종에서 생산성 향상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유럽의 기업들은 미국의 기업들만큼 투자에 나서지도 않았다는 설명이다.
7장 복지와 소득불평등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가 축소되는 방향으로 복지 제도가 변화되지는 않았다. 복지서비스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광범하기 때문에 사회적 지출이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다만 소득 계층간 불평등은 증가했다. 자유주의적인 나라들에서 불평등이 더욱 커졌다. 스칸디나비아 나라와 자유주의적인 경제 체제를 가진 나라들 사이의 불평등의 차이가 더 커졌다. (어느 한 지점으로, 특히 소득격차가 커지는 쪽으로 수렴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이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아직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정치적인 행동이 여전히 중요하다. 저자는 대안으로 기본소득(Basic Income) 계획을 제안한다.
(-)인센티브란 부자에게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소득을 1달러 이전시킬 때마다 부자들의 근로 의욕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부자들의 세후소득이 1달러 이상 감소한다는 것이다(p.244).
그러나 과세로부터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이런 (-)인센티브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은 반면에 복지지출의 대부분은 효율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장래의 세수증대에 기여한다. ...(중략)... 린더트(Lindert)는 복지국가의 경제적 비용에 관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극단적인 세율을] 머릿속에 상정하여 따지기보다 실제로 시도된 정책들의 역사적 세율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로 한정하여 본다면, 세금과 이전지출의 확대는 GDP를 감소시키지(증가시키지도) 않는다."(Lindert 2003: 11). 이런 결론은 (-)인센티브 효과는 복지지출을 속박하는 제약이 아니며, 고율의 조세에 대해 정치적 지지를 얻는 것이 문제임을 가리킨다. (p.245)
정부가 복지 지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 이 증세가 경제 성장에 악형향을 미친다는 주장에 대해 저자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연구 결과를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결단이 중요해진다. 우리가 복지 지출을 늘리자는 정치적 의사 결정에 다다를 수 있을까? 우리는 너무 바쁘고 힘들며, 국회는 저 멀리, 우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지는 않은가?
문제는 이윤의 감소가 투자를 위협한다는 데 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유보이윤이 자금조달의 원천으로 선호되기 때문이며, 새로운 투자의 예상수익이 저하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이윤에 대한 세금의 인상은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에 이러저러한 위협이 가해질 것임을 암시하는 반(反)자본가적 조치로, 그리고 자본가로 하여금 자신감을 잃게 하는 조치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지지출의 증대에 직면해 투자를 삭감해서 소비를 유지하는 것은 국민총생산에 대한 과도한 요구를 단기적으로만 해결하는 방책이다. 투자의 감소는 성장을 느리게 함으로써 장래에 분배갈등을 심화시키기 쉽다. ...(중략)... 법인세의 증가나 이윤압박을 통해 '사장이 지불하게 하는 것'은 투자와 성장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일 위험이 있다는 점이 좌파 정부에 근본적인 문제가 된다. 이 문제는 자본주의 일반의 특징이며, 현재의 세계화 단계에 특수한 것이 아니다. 세계화가 인구에 회자되기 훨씬 전인 1976년에 사민당(SPD) 출신의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독일 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의 기업이윤은 내일의 투자이고, 내일의 투자는 모레의 고용이다."(Bhadhuri 1993에서 재인용).
이상의 논의는 평균적인 OECD회원국에서 왜 법인세가 조세수입에서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실 복지지출이 많은 나라들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가진 나라들보다 자본소득에 대해 더 높게 과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관대한 복지국가들의 추가적인 조세수입은 노동소득과 소비에 대한 추가적인 과세로부터 나온 것이다.
기업의 투자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고액의 개인소득에 더 높게 과세해서 복지국가의 확대를 위해 필요한 자금을 '부자들이 지불하게 하는 것'이 가능한가? ...(중략)... 대부분의 나라에서 현재 적용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누진적인 조세제도를 채택하면 총조세수입은 제법 증가할 것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조세 중 절반 이상의 압도적인 부분은 여전히 최상위 계층 이하의 계층이 내게 될 것이다. (p.246~247)
복지국가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방안으로 얼른 떠오르는 것은 법인세를 인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법인세를 올리면 기업의 이윤이 줄어들고 기대감과 자신감을 상실한 기업이 투자를 줄이게 된다고 설명한다. 투자가 줄어들면 수요가 줄어들고 고용도 줄어들게 되며, 경제 전체의 성장이 둔화되면서 분배갈등이 심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복지지출이 많은 나라들은 임금과 소비세를 통해 그 재원을 마련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북유럽과 같은 복지지출이 많은 나라들은 평균 임금이 높다. 평균임금이 낮은 국가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북유럽국가들은 근로자에게 임금을 주면서 이미 기업에서 근로자로의 1차적인 소득재분배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또한 북유럽의 국가들은 임금격차가 작다. 역시 자유시장주의적 성격이 강한 나라의 국민의 입장에서는 임금을 주면서 이미 계층간 소득재분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임금에 대해 높게 과세를 한다 해도 그 타격은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계층간 소득격차가 큰 나라에서 임금에 대한 과세를 늘린다면 소득 수준이 낮은 계층은 타격이 클 수 있다. 결국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는 것이 관건이 된다.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고 '복지지출에 필요한 재원을 임금소득에 과세하여 마련해야 한다'고 일률적으로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떤 사회가 기업집단과 근로자의 소득 격차가 매우 크다면? 그래도 복지 지출의 마련을 위해 임금소득에 과세에 치중해야 하는가? 어떤 사회가 계층간 소득 격차가 매우 크다면? 소득의 불평등도 줄이지 못하는 사회에서 부자들에게 높은 과세를 매기는 것이 가능할까? 아직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기업의 이윤이 줄어들면 투자가 감소한다는 위 인용문의 주장을 반대로 생각해보자. 기업이 가져가는 이윤이 증가하면 기업은 그 돈으로 투자를 많이 하게 되는가? 잘 모르겠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잘 모르겠다. 기업집단이 축적할 수 있는 부의 상한선이라도 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윤이 늘어났다고 해서 그 돈으로 기업이 꼭 투자를 하리라고 기대를 할 수는 없다. 투자에 관해 경영자가 매우 큰 사회적 책임감을 갖고 있지 않는 한, 투자는 기업의 선택사항이지 의무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의 지출 중 조세수입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복지지출이 임금소득자와 봉급소득자 대중의 세금에 의해 조달되는 정도가 높다는 점과, 그래서 복지국가는 사회보험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p. 248)
복지국가는 사회보험의 성격을 가진다라는 말이 중요한 것 같다. 보험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비용을 지불하고 미래에 혜택을 보는 것이지 그냥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부자에게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득을 이전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결론을 내린다면, 세계화가 불러온 국제경쟁과 경제활동의 자유가 이전에 없던 제약을 복지지출에 새로 부과하는 것은 아니다. 불완전하게 사용되던 자원이 모두 동원되어 총생산이 제약을 받는 단계에서는 복지지출이 개인소비와 투자의 요구와 경합하지 않을 수 없다. 투자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전제한다면 근본적인 문제는 복지국가 확대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임금소득자들에게 조세인상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세계화가 이런 제약들을 심하게 강화시킨 경우에만 복지국가를 유지할 수 없게 한다고 세계화를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p.248~249)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국제경쟁이 격해지고 경제활동에서 자유가 강조되면 복지지출이 줄어들 것만 같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복지지출에 필요한 재원의 큰 부분은 기업이 아닌 임금소득자, 즉, 대중이 지불해왔기 때문이다. 국제경쟁이 어떻든, 경제활등의 자유가 어떻든, 사람들은 일을 할 것이고, 임금을 받을 것이고, 국가는 그 임금에서 세금을 걷을 것이기 때문에, 세계화와 복지지출을 마련하는 것은 크게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지지출의 확대는 세계화가 아니라 임금소득자의 결단을 그 독립변인으로 한다.
OECD 회원국들에서는 법인세율이 평균적으로 크게 인하됐고, 회원국들 사이에 세율이 분명히 수렵했다(이는 세율의 표준편차가 감소한 것에서 볼 수 있다. <표7.1>참조). 그러나 법인세율 인하가 복지국가의 자금조달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앞 절에서 이야기한 이유로 법인세는 결코 조세수입의 주요 원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법인세가 조세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는 이윤압박의 영향으로 감소했지만 1980년대에는 안정적이었으며, 2000년대에는 이윤이 증가함에 따라 같이 늘어나 OECD 회원국의 경우 1980년과 동일한 수준(약9%)이 됐다. (p.251~252)
조세 수입에서 법인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는 주장이 새롭다. 이에 대한 논의들을 좀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법인세가 조세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에 법인세율이 인하되어도 복지 지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OECD는 <일자리 연구(Jobs Study)>라는 보고서를 통해 복지급여의 임금대체율이 높다고 경고했을 뿐 아니라 고용주의 노동비용과 노동자의 순임금 간 차이인 '조세쐐기(tax wedge)'를 감축하라고 요구했다. 조세쐐기는 고용주와 노동자의 사회보장기여, 소득세와 간접세(대부분의 세제가 간접세를 포함하고 있다)로 구성되므로 세수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노동비용을 인하하고 고용을 촉진해야 한다는 이유로 조세쐐기를 감축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곧 복지지출을 축소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이런 모든 압박을 고려할 때 복지국가 지출이 매우 크고 따라서 축소할 '필요'가 가장 큰 나라들에서 그 지출이 감소함으로써 GDP 대비 복지지출의 비율이 낮아지기까지는 않더라도 정체할 것이라고 예상할 만도 했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빗나갔다. <표7.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회적 지출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비해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그 뒤에도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볼 때 계속 증가했다. (p.252)
저자는 복지 지출에 필요한 재원으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임금에 대한 과세이며, 이를 줄일 경우 복지지출이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OECD에서 이러한 임금쐐기를 감축하라고 압박을 가하였음에도 복지지출은 계속 증가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1980년에 이미 사회민주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사회적 지출의 비율이 높았던 북유럽 나라들은 그 뒤에도 자유주의적 경제를 가진 나라들보다 사회적 지출을 '더 많이' 중가시켰다. (p. 253)
북유럽 나라들은 도대체 어떤 나라들인가? 갈수록 더 궁금해진다...
이런 사실은 나바로 등(Navarro et al. 2004: 151)의 결론, 즉 "세계화의 시대에 복지국가가 축소되는 방향으로 복지제도가 수렴하지는 않았다"는 결론의 타당성을 확인해준다. 사회적 지출이 이렇게 감축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복지서비스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광범하다는 데 있는 게 분명하다. 스웨덴과 같은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에서처럼 충분한 재원으로 뒷받침되어 복지서비스의 질이 높은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스웨덴에서는 압도적인 다수의 사람들이 소득의 압도적인 부분을 국가에 의한 고용 또는 국가가 지불하는 급여에 의존하고 있다(Lindbeck 1997). 공적 교육이 훌륭하고 공적 연금이 충분한 나라에서는 수입이 좋은 봉급소득자들도 사적인 교육이나 연금에 매력을 덜 느낀다. 이런 나라에서는 평등에 대한 정치적 지지가 강하다. 이에 대해 바르티아이넨(Vartiainen 2001: 52)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런 정치적 선호는 가장 효율적인 결과가 실현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지만,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라도 그런 정치적 선호를 가진 나라에 대해 적절하지 못한 선호를 갖고 있다고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나라든 다른 나라보다 더 빨리 성장해야 할 윤리적 의무는 없으며, 최하층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스웨덴은 매우 성공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GDP대비 조세의 비율이 높다는 것이 미국을 포함한 다른 어떤 선진국보다 스웨덴이 제조업의 생산성을 더 빨리 상승시키는 것을 가로막지도 않았다. 1990-2003년에 스웨덴 제조업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연평균 6% 증가했다. 이에 비교해 미국의 제조업 생산성은 연평균 5.2%, 유럽의 규제완화 모벨로 칭찬받는 영국의 제조업 생산성은 연평균 3.2% 증가하는 데 그쳤다. 또한 1990년대에 GDP 대비 연구개발비 지출의 비율에서도 스웨덴은 OECD에서 가장 높았고, 영국에 비해서는 50% 더 높았다. 높은 수준의 사회적 지출과 조세가 경제적 동력을 쇠퇴시키는 것이 아닌 게 분명하다. (p.253~255)
매우 인상적인 글이다. 어느 나라든 다른 나라보다 더 빨리 성장해야 할 의무는 없다. 우리는 경쟁하면서도 왜 경쟁을 해야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저자는 두 가지 상투적인 인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첫째,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복지국가가 퇴보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둘째, 세율이 높으면 경제 성장이 둔화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복지급여제도에 대한 중산층의 지지는 그 제도가 자기들의 희망을 충족시킬 때 훨씬 더 강력하다. 예컨데 정액 국가연금은 중산층으로 하여금 사적 연금제도에 더 많이 의존하게 하며{국가연금의 지급액이 중산층에게는 너무 적기 때문}, 이로 말미암아 영국에서처럼 국가연금이 비참하리만치 잔여적인 안전망이 되기 쉽다. 복지국가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정도의 금전적 독립성을 갖춘 상황에 맞게 변해야 한다. (p.262)
극빈층을 위한 최소한의 금액을 지급하는 복지제도가 아닌 중산층의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할 수 있는 복지제도를 갖추어야 복지제도가 중산층의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경제적 변화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그런 변화의 불가피한 결과로 평등주의가 약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복지국가는 정치적인 행동에 의해 창조됐고, 지난 30년 동안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치적 행동에 의해 방어됐다. 아시아가 공업화하고 있고 이주가 증가하고 있다고 해서 그 영향 때문에 오늘날 복지국가를 방어하거나 확대시키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 쓸모가 없게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에 적합한 더욱 지구적인 평등주의의 개념을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형태의 연대와 정치적 동원을 발전시키는 데는 상당한 창의성이 요구될 것이다. (p. 269)
정치적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잇다. 세계화로 인한 경제적 변화들이 자유시장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 마냥 믿게 만드는 그것을 매우 주의해야 한다. 자연스러운 것으로 믿는 순간 불가항력적인 것, 주어진 조건, 변화가 불가능한 조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변화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읽게 되는 인용문이다. 저자가 힘주어 말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세계화로 인해 우리의 정치적 행동이 쓸모가 없게 된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연대를 위한 창의성이 필요하다.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역사가 분배에 대한 태도와 분배 유형에 큰 차이를 낳은 것이 분명하다. 소득분배에서 노동자에게 불리한 변화가 일어난 것에 대해 그것은 단순히 시장기구의 작동이 낳은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결과라면서 시장을 탓할 수는 없다. 정치가 변함없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p. 269~270)
사람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직업 간 소득 격차가, 스웨덴이나 노르위에보다는 미국에서 더 크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저자가 밝힌 의견이다. 즉, 스웨덴 사람들이 부당하다고 느낄 법한 직업간의 상당한 소득 격차에 대해 미국 사람들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역사에 따라 사람들의 불평등에 대한 인식에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선택하고 어떤 정치적 역사를 만들어 갈지를 결정하는 정치적 의사결정이 변함없이 중요하다.
나는 가끔 무엇인가가 사람들이 어떤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정작 우리는 "같은 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정치를 통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현실 말이다. 그러므로 정치가 변함없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을 중요하지 않게 만드는 데에 현대 정치의 비극이 있다.
1960년대에 경제성장이 경제의 중심적인 목적으로 승격되자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해와 혼잡의 증가가 초례하는 비용, 천연자원의 고갈에 따른 성장의 물리적 한계 등이 강조됐다. 과연 생산량이 커지면 우리가 이득을 보긴 보는 걸까? (p.270)
궁극적인 질문이다. 과연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누가 결정을 내린 것인가?
사람들에게 "당신은 얼마나 행복하거나 만족합니까?"라고 물어보는 사회조사가 오래전부터 실시돼 왔다. 사람들의 응답을 시기별로 나누어 비교해보면 놀랄 만한 결론이 나온다. 1인당 GDP가 오랜 기간에 걸쳐 크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밝힌 만족도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저하게 상승하지는 않았다. 일본에서는 "1958-1991년에 1인당 소득은 여섯 배로 증가했지만 국민들은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Frey & Stutzer 2002: 8)고 한다. 미국에서는 1945년 이래 좀 느리긴 해도 경제성장이 상당히 이루어졌는데도 조사된 생활에 대한 만족도의 평균치는 거의 변하지 않았으며, 영국에서도 그러했다. 몇몇 유럽 나라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1975년 이래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평균적으로 약간 상승했지만 그 상승은 "소득의 거대한 증가에 비교하면 보잘 것 없다"(Layard 2005: 30)고 한다. (p.270~271)
왜 경제가 성장한 만큼 사람들의 만족도가 높아지지 않나? 그보다 먼저 소득이 높아지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대부터 따져봐야 할 것 같다. 이 기대의 출처는 어디인가? 더 많은 소득을 벌기 위해 더 많이 일하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돈 때문인가? 위의 인용문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돈이 없으면 불행해지는가?
행복이란 뭘까? 내 경험 속에서 행복했던 순간들을 찾아본다. 어린 시절 집에서 어머니와 같이 있을 때의 정서적 안정과 평화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잘 놀았을 때가 행복했다. 대체적으로 돈보다는 친밀한 인간관계와 정서적인 안정감에서 행복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부모 세대는 가끔, 정말 궁핍했던 50~70년대 시절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것들, 필요한 것들을 갖추지 못한 채 성장해야 했다면 평생 좌절감을 느끼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세대간 경험의 차이를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할까?
조사에 대한 응답은 또한 특정한 시점에서 보면 각국 안에서 소득이 높은 사람들이 소득이 낮은 사람들보다 생활에 대해 훨씬 높은 수준의 만족을 느낀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에 논의가 복잡해진다. ...(중략)... 첫 번째 설명은 내가 느끼는 만족도에는 내 소득의 절대적 수준보다 주위 사람들의 소득이나 평균소득, 또는 어떤 비교대상 집단의 소득에 대비한 내 소득의 상대적인 수준이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중략)... 두 번째 설명은 소득증가의 효과를 상쇄하는 어떤 다른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중략)...'미국 사회조사(US General Social Survey)'에 따르면 개인의 행복에 기여하는 요소 가운데 자금사정은 두 번째로 중요하고 첫번째는 가족관계, 세번째는 일이 중요하다. 가족의 시간 중 점점 더 많은 부분이 일에 사용돼야 하기 때문에 가족관계는 억압당할 수 있다. 모든 성인이 다 일하는 가정이 점점 더 많아지고 노동시간의 감소가 중단돼 버린 미국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중략)... 영국, 독일, 그리고 아마도 미국을 포함한 다수의 나라에서 직업에 대한 만족도도 조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지난 30년 동안 저하하는 경향을 보였다. 일을 할 때 흥미를 더 많이 느끼게 해준다고 생각되는 노동자의 숙련수준이 높아진 점을 고려하면 이런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자격을 갖춘 노동자를 위한 일자리 가운데 다수는 자격을 갖춘 노동자의 기술을 실망스럽게도 적게만 이용하며, 노동의 ''유연성'을 증대시키라는 끊임없는 요구는 리처드 세네트(Richard Snnett)가 명확히 실증한 것처럼 일에 대한 만족도를 저하시키고 개인적인 불안정감을 낳을 수 있다. (p.271-272)
평균 소득이 많아졌는데도 그에 비례하여 사람들의 만족도가 높아지지 않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 가지 설명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수준을 과거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소득이 높은 사람들은 같은 시대의 소득이 낮은 사람들보다 생활에 만족도가 높다. 두 번째 설명은 높은 소득을 벌기 위해 더 많이 일하다보니 오히려 생활에 여유와 즐거움,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없어져서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현재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도 위 인용문을 통해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한 것 같다
부유한 나라에서 소비자이기도 한 노동자는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계속 달려야 하는 쳇바퀴 안에 있다는 생각을 뒷받침한다. 우리가 소비증가를 위한 노력을 덜 하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 모두가 이익을 얻겠지만, 이웃사람들보다 뒤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대부분이 감히 그렇게 동의하고 나서지를 못하는 것이다. (p.272~273)
정말 심금을 울리는 문단이다. 속이 다 후련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자님." 우리가 쳇바퀴에서 벗어나자 못하는 데에는, 경제, 정치, 인간의 심리, 사회 문화가 얽혀 있다.
우리는 번 돈으로 소비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먹고 산다'라고 쉽게 표현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정말로 생존을 위한 '의식주'는 이 소비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소비는 의식주의 해결 외의 더 많은 것들을 포괄하고 있다. 정말로 소득이 적어서 의식주를 걱정하다가 정작 소득이 늘어나면 다른 부분으로 소비가 확장되는데, 그 순간을, 그 경계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그 경계가 과연 뚜렷한지도 의문이다.
소비에는 체면, 위신을 위한 소비, 그리고 무엇인가로 인해 확대되거나 결핍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소비가 포함되어 있다. 이 결핍과 욕망을 감소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소비를 줄면서 일을 덜 할수 있다. 이 결핍과 욕망의 정체는 뭘까? 좀더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우리는 일단, 그렇게 덜 소비하고 덜 일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접하기 어렵다. TV에 안 나온다. 이런 사람들은 숨어있다. 굳이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돈을 벌 필요가 없으니까.
개인이 그렇게 살고 싶어도 못한다. 왜 일까? 두렵다. 집단에서 뒤쳐지고 따돌림 받는 느낌, 외로워지는 느낌이 싫어서일까? 이 역시 인간의 본성 때문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그러한 심리를 갖게끔 우리를 부추기고 있는 것일까?
우리 문화가 그러한 개인의 용단을 쉽게 허락치 않는 문화라서? 일단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사람이 없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이 행복해지는지 모르거나 다른 것을 추구해야만 한다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방법은? 어떻게 해야 이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그 과정을 이끌 누군가는 어디 있나?
더욱이 지역사회와 직장에 대한 애착이 줄어들고 대중매체의 영향이 증대되면서 이웃사람들과의 비교보다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들과의 비교가 장려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중략)... 근본적인 핵심은, 자본주의가 계속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 노동생산성 상승의 편익이 사회에 선택의 메뉴를 제시해준다는 점이다. 인구 1인당 생산량의 증대가 하나의 선택이고, 노동시간의 단축이 다른 하나의 선택이다. 우리가 본 것처럼 미국은 물질적 생활수준의 향상을 선택했는데, 그 혜택은 최근 몇십 년 동안 주로 가장 부유한 계층에 돌아갔다. 유럽에서는 1인당 노동시간이 계속 단축됐고, 최근의 한 연구는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노동시간과 생활에 대한 만족도 사이에 (-)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Alesina et al. 2005: 30). 쇼어는 미국의 1948년도 생활수준 정도는 지금 노동시간의 50%미만으로도 재생산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문제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제시했다. "상상해보라. 지금 미국의 모든 노동자가 2년에 한 번씩 1년동안의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Schor 1992: 2).
우선 목표를 경제성장에서 다른 것으로 변경하는 것은 대부분의 좌파에게도 큰 사상전환을 요구할 것이다. 20세기의 사회주의 사상은 공황에 빠지기 쉬운 자본주의보다 공동소유가 물질의 생활수준을 더 빨리 개선할 수 있고 소득분배도 더 공평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장기적인 목표는 언제나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를 더욱 잘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아직 자본주의 경제가 지배적인 상황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진지하게 나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p.273~274)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는 어떻게 이루지는가? 개인화되고 도시화 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에도 주변 사람들보다는 대중매체에 나오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기가 쉽다는 지적이다.
성장과 분배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파이의 비유를 많이 든다. 위 인용문에 의하면 미국은 파이의 크기를 키우는 쪽을 택했는데 그 혜택은 주로 부자들이 가져갔다는 설명이다. 유럽 나라들은는 파이를 더 크게 키우기보다는 더 많이 쉬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파이를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는 선택안도 있다. 처음부터 공평하게 나누면 파이를 더 크게 만들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끌어내기가 더 쉽다는 것이다. 저자는 두 번째 선택안을 좀더 광범위하고 본격적으로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왜 세 번째가 아닌 두 번째일까?
두 번째 관점은 세 번째 선택안, 즉 '파이를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주장을 희석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배투쟁을 덮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이 든다. 현대 사회에서 분배투쟁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대중들은 상당한 정치적 역량을 결집시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쉽지 않게 만드는 여러 요인들이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한 쪽이 힘을 주면 상대방도 그에 맞서 힘을 주게 될 것이다. 긴장은 고조되고 갈등은 커질 것이다.
두 번째 안은 길을 약간 돌아 가는 것 같다. 그러나 상당히 매력적이다. 두 번째 안은 파이를 크게 키우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그 대신 여유를 얻고자 한다. 이러한 시각은 '경제'와 '성장', '돈'을 위한 노력들로 가득 찬, 우리를 둘러싼 공기를 환기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관점을 전환시키고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이 두 번째 주장의 의도인 것 같다. 일단 파이에 쏠린 관심이 사그라들면,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파이가 부족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분배 갈등을 풀기가 한 결 더 순조로워 질 수 있다.
고민거리에 괴로워질 때가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이런 때는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다. 이런 문제들이 결국 어떻게 해결되었을까? 내 경험에 의하면 해결이 되지 않는다. 다만 잊혀질 뿐이다. 잊혀진 후에는 그 문제가 사실은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넓고 유연한 시각은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갖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성장 과정인 것 같다. 두 번째 관점은 이렇게 넓고 유연한 시각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1인당 노동시간이 계속 단축되어 왔다고 한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1992년에 쇼어가 했다는 주장은 매우 인상적이다. 한 번쯤 시도해 볼만하지 않는가? 우리의 경우 70~80년대처럼 생활하는 대신 지금의 1/2만큼만 일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 나 개인 한 사람으로 좁혀서 생각해보자. 소득을 1/2로 줄이는 대신 일도 1/2만 하게 된다면 어떨까? 일단 저축이 줄 것이고 소비도 줄여야 할 것이다. 큰 몫돈을 만들기는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외식을 덜 하고, 새 옷도 덜 사고, 차도 운행을 덜 하거나 팔아야 할 수도 있다. 대신 시간은 많이 늘어나게 된다. 그 시간동안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잘 수도 있을 것이다. 여가활동도 돈이 덜 드는 쪽으로 즐겨야 한다. 돈 들이지 않고 놀 수 있는 방법이 많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사람들은 놀기 위해 많은 돈을 쓴다. 왜 그럴까? 친구를 만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는데 드는 돈이 결코 저렴하지 않다. 또한, 돈을 매개하지 않은 활동들이 거의 없다. 예전에도 그랬을까?
케인스는 <평화의 경제적 귀결(The Economic Copnsequences of the Peace)>에서 1914-1918년의 전쟁이 벌어지기 전의 유럽을 조리 있게 분석하면서, 경제성장이 계속되면 "마침내 물자가 생활을 하기에 충분하게 되고, 우리의 후세가 우리의 노동을 향유하게 되는 날이 아마도 올 것이다. 그 날에는 과도노동, 과잉밀집, 음식부족이 사라질 것이고, 생활을 위한 편의품과 필수품을 확보한 인간이 재능을 더욱 고상하게 발휘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다(Keynes 1919: 18). 지금 영국의 1인당 GDP는 케인스가 위 글을 쓴 때에 비해 네 배 이상이다. 부유한 나라들의 생산능력을 1세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정도로 발전시킨 자본주의는 과연 일과 여타활동사이에 새로운 균형이 이루어지게 할 기초를 놓았는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는 가장 혁신적인 정책제안은 기본소득(Basic Income) 계획이다. (p.274)
과연 케인즈가 생각한 그러한 날이 올 것인가? 일단 케인즈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했느냐를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을 한다. 그리고는 익숙해진다. 이 익숙해짐이 '역치'라는 개념에 잘 나타난다. 신경세포, 그리고 우리의 뇌, 그리고 감정은 변화를 느끼는 최소한의 단위, 역치값을 가지고 있다. 같은 크기의 자극이 지속적으로 주어지면 우리의 신경세포는 그 자극을 더이상 자극으로 인식하지 않고, 더 큰 자극이 주어져야만 변화를 인지한다. 사탕을 좋아하는 어린 아이에게 이빨 썩는다면서 사탕을 전혀 못 먹게 하다가 어느 날 사탕 한개를 주었다. 매우 좋아한다. 다음 날도 한 개를 주었다. 역시 좋아하지만 어제 만큼은 아니다. 며칠 동안 계속 사탕을 한 개씩만 준다. 이제 아이는 더 많은 것을 바란다. 사탕 한 개만 주면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사탕을 처음 준 날 만큼 아이를 기쁘게 하려면 사탕을 두 개, 세 개는 주어야 한다. 역치값이 계속 커지기 때문이다. 현재 상황에서 케인즈가 생각하는 경제적 귀결이 오기 힘든 이유는, 생활 수준이 향상 될수록 사람들의 역치값이 계속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생명체로서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생물은 환경이 변화하면 적응을 해야 한다. 경제가 성장해서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 우리는 또 거기에 적응을 하고 만다. 그렇다면 끊없는 경제성장을 향해 나아가야 할까? 무한대로 커지는 역치값을 뛰어넘기 위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우리가 역치값을 유지하거나 줄이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위에서 결핍과 욕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무엇인가가 사람들로 하여금 결핍감을 느끼게 하고 지속적으로 욕망을 갖게 한다면, 그로 인해 우리의 역치값이 계속 커지고 있는 것은 아날까?
역치값을 의식적으로 작게 만들 수는 없을까? 역치값을 그대로 유지하는 태도, 이것을 우리는 '만족'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역치값을 줄이는 태도, 이것을 우리는 '감사'라고 부르는 것 같다. 이 두가지 태도의 도움 없이 과연 케인즈아 생각한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 올 수 있을까?
무엇인가 계기가 필요할 것만 같다. 전환의 계기 말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기본소득 계획을 소개한다.
기본소득을 도입한다는 것은 복지국가의 요소들을 매우 가치 있는 평등화의 방향으로 개조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중략)... 사실 기본소득은 사회 전체의 우선목표를 더욱 근본적으로 바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주로 수단적인 것이지 어떤 내면적인 욕구까지 반드시 충족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살기 위해 일한다"는 말은 미국의 어느 자동차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표현이었는데, 그는 월요일마다 결근한다고 성내는 경영자에게 "나는 일주일에 사흘 일해서는 먹고 살 수 없으니까 나흘 동안 일한다"(Hallberstam 1987: 495에서 재인용)고 일갈했다고 한다. (p.276)
정말 존경스러운 노동자다. 이정도의 배짱과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움직임이 집단화 된다면 어떻게 될까? 주4일제가 될 수도 있다. 휴가가 늘어나거나 기업의 채용 인원이 늘어나는 대신 근로시간이 단축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내면적인 욕구까지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다. 노동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삶의 큰 부분을 의미 없는 일에 할애한다는 것은 생명의 낭비이고 지구의 슬픔이자 우주의 비극이다.
기본소득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안전을 누리게 해주며, 따라서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사람들이 임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이거나 (매우 금욕적인 극소수의 사람들은 돈을 버는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내면적으로 더 만족스러운 활동을 하는 시간을 늘릴 수 있을 거싱다. 예컨대 아동소설 작가인 조엔 롤링(J. K. Rowling)의 흉내를 내거나, 정치적 활동가가 되거나, 기타를 치는 기술을 연마해 록음악가가 되거나, 컴퓨터광이 되어 온라인에서 공짜로 배포하는 '오픈 소스' 컴퓨터 프로그램의 개발(Kogut & Metiu 2001)에 몰두하거나, 다시 학생이 되거나, 정원사가 되는 것 등에 자기의 시간을 더 많이 배정할 수 있을 것이다. (p. 277)
흥미로운 제안이다. 좀더 고려해 볼 제안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핵심을 말한다면, 만약 기본소득 계획이 공식적인 부문의 노동시간을 약간 줄여서 그 줄인 사간을 여러 가지 활동에 더 균등히 배분되게 한다면 이 계획의 효과는 전적으로 유익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수의 공식적인 부문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은 지금과 같은 형태에서는 심각한 '(-) 외부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노동은 개인적 인간관계를 위한 시간을 빼앗아가고, 내면적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활동(이런 활동과 달리 공식적인 부문의 노동은 흔히 인간을 소외시킨다)에 사용할 시간을 빼앗아가며, 공식적인 부문에서 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이루어지는 소비는 환경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p.279)
영혼을 울리는 문단이다.
'시간'을 언급해 주어서 참 고맙다. 그렇다. 근로자의 입장에서 가장 아쉽고 억울한 것이 시간이다.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없다. 우리는 너무 긴 시간 동안 일하고 있다. 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것 뿐이다. 우리의 삶은 소중하다. 따라서 그 삶의 내용물인 시간은 매우 소중하다. 그 시간을 인간적이지 않은 활등을 하느라 다 써버리는 것은 억울하기 그지 없다.
저자는 소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노동에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증거다. 그 소외감은 소비로 해소시킬 수 없다. 소비는 그 자체로도 여러가지 문제를 낳는다.
저자가 소개하는 기본소득제도가 도입된다면 기대했던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여부는 둘째로 치고, 나는 저자가 가리키는 방향이 참 마음에 든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서 반갑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여러가지 질문들을 던질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꽤 긴 글이 되어 버렸다. 생각나는 대로 정리를 해보자.
1.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확대로 나의 생활이 피폐해졌을 것이라고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여전히 정치적 의사결정에 따라 우리의 생활을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2. 경제적 성장이 행복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오히려 서로를 비교한다. 그 비교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느라 자신을 소외시키는 노동, 긴 근로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를 나의 생활에 적용을 해보자.
1.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정치적 의사결정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생활이 변화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정치적 의사결정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투표다. 그러나 투표때마다 나는 무기력해진다. 나의 투표가 별 의미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선택안들 사이의 차이를 느끼지 못해 무기력히지고 나의 투표가 별 비중이 없어 보여서 무기력해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국회는 왜 저리 요원한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2. 나 역시 남들과의 비교에서 뒤쳐지기 않기 위해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먼저,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으로부터 초연해질 필요가 있다. 만족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부터 얻으려는 태도를 곰곰히 다시 생각해보자. 이전 글에서 '연극'이야기를 했다. 사실,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조차도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혼자의 힘으로 벗어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오로지 내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일까?
<인용한 부분에 표시된 참고 문헌들>
Alesina, A., E. Glaeser, and B. Sacerdote (2001), 'Why Doen't the US have a European-Style Welfare State', Brookins Papers on Economic Activity, 2: 107-77.
Bhadhuri, A. (1993), 'The Economics and Politics of Social Democracy' in P. O. Bardhan, M. Datta-Chaudhuri, and T.Krishnan (eds.), Development and Change: Essays in Honour of K. N. Raj, Delhi: Oxford University Press.
Frey, B., and A. Stutzer (2002), Happiness and Economics, Princeton: Princeton Univercity Press.
Halberstam, D. (1987), The Reckoning, London: Bantam Books.
Keynes, J. (1919),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 London: Macmillan.
Kogut, B., and A. Metiu (2001), 'Open-Source Software Development and Distributed Innovation', Oxford Review of Economic Policy, 17(2): 248-64.
Layard, R. (2005), Happiness, London: Allen Lane.
Lindbeck, A. (1997), 'The Swedish Experiment', Journal of Economic Literature, 35(3): 1273-319
Lindert, P. (2003), 'Why the Welfare State Looks like a Free Lunch', NBER Working Paper 9869.
Navarro, V., J. Schmitt, and J. Astudillo (2004), 'Is Globalisation Undermining the Welfare State',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28: 135-52.
Schor, J.(1992), The OverWorked American, New York: Basic Books.
Sennett, R.(1998), The Corrosion of Character, N York: W. W. Norton.
Vartiainen, J. (2001), 'Understanding Swedish Social Democracy: Victims of Success', in A.Glyn (ed.), Social Democracy in Neoliberal Time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6/2/7 추가>
핀란드에서 기본소득 제도를 실행에 옮길지를 놓고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책에서 접했던 내용이 실제로 논의되고 있다니 신기했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었던 기본소득 제도를 검토 중이라니, 같은 지구상에 이런 나라도 있구나 싶다. 기사에 따르면, 보수파 쪽에시 이 기본소득 제도를 추진하고 있으며, 기본소득 제도가 기존의 복지 제도를 대체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여기에 기사 주소를 링크한다: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40905.html
<2016/6/7 추가>
스위스에서는 기본소득제도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찬성 23%, 반대 77%로 부결되었다.
관련 기사 참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012138005&code=97010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70205&artid=201606061729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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