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인 주거 공간은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이다. 따라서 때로는 절박하게 어떤 집을 사게 되기도 하고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다고 생각하면서도 빚을 내서 집을 구매하기도 한다. 그리고 거의 평생을 이 빚을 갚으며 힘든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부동산 가격 폭등의 매우 큰 피해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부동산에 대한 투기적 수요도 존재한다. 또는 특정인의 수요에 실제 수요와 투기 수요가 혼재되어 있기도 한다. 투기적 수요에 국한해서 생각했을 때, 한국의 부동산 가격을 둘러싼 현상들에서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의 요소들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언젠가 뉴스를 보다가 들은 이야기다. 아파트 가격의 오름세가 우려된다는 보도였는데 보도 중에는 한 부동산 중개인을 인터뷰한 부분이 있었다. 그 부동산 중개인은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 이 아파트 가격이 3억원 5천 정도인데, 한 두 채만 4억원에 거래되면 전체 이 아파트 단지의 모든 아파트의 시세가 4억 원으로 뛰게 된다."


  해당 아파트는 주변 여건을 포함하여 상품으로서의 본질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이 더 높은 가격에 구입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가격이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체나 내용의 변화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변화가 마치 있었던 것처럼 더 많은 돈을 주고 그 아파트를 사게 된다. '벌거벗은 임금님'이야기에서 황제의 옷이 그 실체가 없었던 것처럼, 이 5천만 원의 가격 상승분도 그에 상응하는 실체가 없다. 


  내용이나 본질이 없더라도 '시늉'이 그 자리를 충분히 대신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강남 아파트가 10억 원 인 것처럼 시늉한다. 사람들은 서로 그런 가격으로 매매를 하고, 은행에서는 그 아파트를 담보로 그에 못지 않은 큰 돈을 대출 받을 수도 있다. 아파트를 여러 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큰 부자로 여겨진다. 아파트를 사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을 모아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들과 행위들은 모두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에서의 '시늉'에 해당한다. 그것이 실제로 경험된 사실들일지라도 마찬가지다. 황제의 옷이 없는데도 마치 있는 것처럼 행동을 했듯이, 사람들은 아파트의 실제 원가와 본래의 가치가 낮은데도 마치 높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포장이 내용을 압도하고 있고, 태도가 본질을 압도하고 있다.

  

  사람들이 애써서 저항하거나 의심하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가격이 수억 원에서 수십 억 원 쯤은 되는 것이 현재의 대세이고 흐름이다. 개인의 힘으로 이런 흐름을 막거나 대세를 역전시킬 수는 없다. 다른 사람들도 황제의 옷이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으므로 나도 그에 따르는 것이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대중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물론 피해자이다. 당신은 터무니 없이 높은 아파트 가격을 감당하기 위해 평생동안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해자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당신이 높은 가격을 감당하자, 다른 사람들도 당신의 행동을 근거로 높은 가격을 감당하려고 한다. 당신이 황제의 옷이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면 다른 사람들도 옷이 보이는 것처럼 행동할 가능성이 커진다. 당신의 행동이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즉, 당신은 그들에게 ‘이유’를 빌려준다.


  한국의 부동산 사례에서 '꼬마의 외침'은 무엇일까? 부동산 경기의 침체, 혹은 '거품이 꺼지고 있음'을 알리는 최초의 거래, 즉, 매우 낮아진 가격에서 이루어지는 최초의 거래를 의미할 것이다. 가격이 폭락하면 그제서야 사람들은 진실이 무엇인지 깨닫고, 지금까지의 행동들이 시늉이었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특정한 경향을 너무 두드러지게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그 아파트의 가치가 얼마라고 생각하느냐'가 ‘다른 사람들이 그 아파트를 얼마에 주고 샀는지’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아파트의 가치가 얼마인지 스스로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빌려와서 내 선택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 같다. 그 다른 사람은 스스로 판단을 내렸을까? 아니다. 그 역시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유’를 빌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순환논증이다. 사람들은 아파트 가격에 대해 스스로 동의하지 않았으면서 마치 동의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사람들은 생각보다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고, 세상은 생각보다 허술해 보인다. 나는 질문한다. "순환논증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즉, 한국의 부동산 사례에서 작정을 하고 사기(詐欺)를 치기로 마음먹은 '재단사'들은 존재하는가? 재단사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들의 사기에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가? 이들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도록 내버려 두어도 좋은가? 황제의 옷과는 달리 부동산 문제는 우리의 삶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번에는 꼬마의 외침이 들린 후, 창피함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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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동의와 문맥’에 대해 생각하다가,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바로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이 이야기에는 사람들이 주어진 흐름에 맹목적으로 동조하는 현상이 풍자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어느 무능하고 옷만 좋아하는 황제가 있었다. 어느 날 황제의 앞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감으로 세게 제일의 옷을 만들 줄 안다고 주장하는 두 재단사가 나타났다. 황제는 기뻐하며 그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며 그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오라고 하자 재단사는 그 옷감은 '구제불능의 멍청이에게는 안 보이는 옷감'이라고 못 박아 두었다.


  그 뒤에 황제는 재단사들을 의심하여 신하를 보내 옷의 완성도를 체크하게 했는데, 신하의 눈에 분명 옷은 보이지 않았고, 재단사들은 허공에서 옷을 만드는 시늉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신하는 혹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가 바보로 보이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옷이 만들어지고 있는다고 거짓말을 했고, 이후 파견한 다른 신하들도 같은 이유로 옷이 보인다고 거짓말을 하고... 무한 테크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어느 날 재단사들이 옷이 완성되었다며 황제에게 선사했다.


  물론 황제 역시 옷이 안 보이긴 마찬가지. 하지만 신하들이 그동안 옷이 보인다고 했으니 자기만 안 보인다고 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바보라고 손가락질 할 것이 두려워 황제도 아름다운 옷이라고 극찬한다. 그리고 황제는 재단사들에 의해 그 옷을 입었다. 물론 재단사들은 입히는 시늉만 했고, 황제도 장단 맞춰 입는 시늉만 했다.


  황제는 옷을 직접 입고 거리 행차를 나갔다. 사실 길거리에 있던 사람들+신하+기타 등등 모든 이들의 눈에 옷은 보이지 않지만 자기들도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아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는데, 한 꼬마가 '황제폐하께서 벌거벗었다!'라고 소리치면서 드디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과 황제는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정말 옷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황제는 체통을 생각하여 이를 무시하고 계속 행차를 이어나갔다.


<출처>  https://namu.wiki/w/%EB%B2%8C%EA%B1%B0%EB%B2%97%EC%9D%80%20%EC%9E%84%EA%B8%88%EB%8B%98




  이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요소들을 살펴보자. 


  - 재단사들

  일단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기획했던 이들이다. 보통, 이런 이들을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 "구제 불능의 멍청이"

  재단사들은 자신들이 만든 옷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에 따라 구제불능의 멍청이인지 아닌지가 결정된다는 ‘사회적 평가 체계’를 설정해 놓았다. 안 보이는 이에게는 “구제불능의 멍청이”라는 조롱, 비난, 무시 등의 처벌이 뒤따를 수 있다. 그러한 처벌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처벌이 일어날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인지시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신하들

  그래도 사회의 지도층이라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안위, 두려움 때문에 재단사들의 기획대로 움직이게 된다. 


  - 시늉

  옷은 없다. 즉, 실체는 없다. 그러나 재단사들은 실체가 있는 것처럼 시늉을 함으로써 정말로 실체가 있는 것과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황제는 옷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그것을 입었고 행차까지 했다. 내용이 없어도 포장을 이용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태도가 본질을 대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체를 빼버려도 상관 없다는 뜻이다. 이는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할 때, 언어적 요소보다 비언어적 요소를 훨씬 더 중시한다는 점과도 관련되는 것 같다. 


  - 대세(맥락, 문맥)

  ‘시늉’과 ‘사회적 평가 체계’가 일정한 흐름을 만들어 놓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는다.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옷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에 저항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각능력이나 이성보다는 일단 대세에 따른다. 


  - 거짓말

  사기를 치려는 재단사들은 그렇다 쳐도, 신하들과 황제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정직하지 않다. 이 이야기에서 정직한 이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소리친 꼬마뿐이다. 각각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정직하게 대하고, 또 스스로에게 정직한 삶을 산다면, 재단사들의 기획은 실패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이 이야기는 황제, 신하, 그리고 길거리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정직하지 않은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정직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정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양심과 배짱을 세트로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때묻지 않은 어린 아이처럼 순수해야 한다.. 


  - 관계와 소통

  신하들 중 충신은 없었나 보다. “구제불능의 멍청이”가 될 각오를 하고 황제에게 충언을 해주는 신하가 없었다. 피상적인 군신(君臣) 관계로 추측된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어땠을까? 원작을 읽어보지는 않아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위 인용문처럼 길거리의 사람들도 옷에 관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나 실은 저 옷이 안 보여…’라고 옆 사람에게 말할 수 있었고 이것이 반복됨으로써 ‘나만 안 보이는게 아니구나’라는 인식을 모두가 공유하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여전히 황제에게 대놓고 벌거벗었다고 말하기는 두려워서 잠자코 있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적어도 재단사들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은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친밀하지 않고 피상적이거나 사회가 개인화 되었을 경우, 그 사회는 사기와 기만에 농락 당하기 쉬워지는 것 같다. 즉, 조직과 사회의 비합리성이 커진다. 반대로, 친밀한 관계, 활발한 소통을 통해서 사기(詐欺)에 대한 사회의 면역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 대중

  이 이야기에서 길거리의 사람들, 대중의 역할이 가장 흥미롭다. 이들은 피해자 쪽에 가까운가, 가해자 쪽에 가까운가? 이들도 황제처럼 피해자로 볼 수 있다. 이들도 황제의 새 옷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오는 등 얼마간의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또한 ‘옷이 정말로 있는가 보다’라면서 애써 자신의 눈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이 피해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옷이 눈에 보인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동의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이 사기 행각을 방조했다. 가해자 쪽에 가깝다 한들 이들은 처벌받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방조하는 쪽을 선택한 적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저 주어진 흐름에 몸을 맡겼을 뿐이다. 선택하지 않았으므로 책임도 없다. 어른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어떤 잘못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꼬마 아이보다도 인지능력, 사리분별력, 행위 능력이 떨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약간 정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중은 금치산자란 말인가?


  - 꼬마의 외침

  진실의 선언이다. 거짓을 모르는 순수함이 진실을 선언한다. ‘당연함’을 천명한다. 빨간 것을 빨갛다고 말하고, 파란 것을 파랗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중얼거림이어서는 안 되고 외침이어야 한다. 


  - 사기(詐欺)

  전체적으로 이 이야기는 사기(詐欺)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식으로 사기가 기획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실행되는지, 그것에 필요한 요소들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그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로 여겨서는 안 될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약간씩 다른 모습으로 여전히 되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현재의 많은 현상들 속에서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의 구조, 상황,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고, 여러 다른 요소들과 함께 혼재되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