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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을 수행하기에는 지성도, 인성도, 경험도, 아무런 능력도 없는 A라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한다. 과연 가능할까?
그들의 첫 목표는 그가 "대권주자"로 불릴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그가 대권주자로 거론될 만한 적당한 직함과 행적을 쌓게 한다. A는 여러 직함들을 쌓아 가다가 국회의원도 된다. 그렇지만 그가 직함을 달고서 실제로 하는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대통령 선거가 1~2년 여 앞으로 다가온다. 이제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대권주자"로 불리도록 작업을 한다. 그가 정말 대권주자인 것처럼 그를 대하고, 행사장이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그를 소개할 때 "차기 대권주자"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언론에 보도자료를 낼 때도 "대권주자"라는 표현을 넣는다. 관계가 깊은 유력 언론사는 그에게 "차기 대권주자"라는 표현을 앞장서서 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언론사들이 같은 표현을 쓰게 된다. 그 표현을 따라 쓰는 기자들도 그를 차기 대권주자로 표현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는 고민하지 않는다. 다른 언론사들이 그렇게 쓰고 있거나, 위에서 그렇게 지시하거나, 또 이미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언론이 그를 설명할 때 "차기 대권주자"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상당수는 그것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저 사람이 차기 대선 주자로 물망에 오르고 있나 보다'라고 생각하거나,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를 차기 대선 주자 중의 한 명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 표현에 대한 반응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복잡하든 단순하든,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차기 대권주자 중의 한 명으로 각인된다. 일부 사람들은 언론이 그를 차기 대권주자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질 수 있다. 'A가 무슨 자격으로 유력 대선 후보로 불리는 것인가? 누구 마음대로?'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언론사에 전화하여 "그를 지칭할 때 "차기 대권주자"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거나 그에 관한 보도의 양을 줄여달라고 항의를 해야 하나? 그런 요청을 한들 언론사가 받아들일까? 사실상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언론이 A를 대권주자로 표현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A에 대한 인지도는 높아진다. 언론은 인지도가 높은 인물에 관심을 더 기울이는 법. 기자들은 A를 더 취재하려고 하고 A는 신문과 방송에 더 자주 노출된다. 사람들의 인지도는 더 높아진다. 이제 그는 유력한 대권주자가 된다.
이쯤해서 많은 여론조사가 실시되고 결과가 발표된다. 많은 사람들이 차기 대권주자 중에서 지지하는 인물로 A를 답한다. A와 B와 C, D, E 말고 또 누가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언론에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사람들이 이 다섯 명뿐이기 때문이다.
A는 자신의 소속 정당의 경선에서 승리하여 '대선 후보'가 된다. 상대 당의 후보인 B와의 경쟁 구도가 치열지면서 A의 인지도는 더욱 상승한다. 이제 전 국민 중 A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선거가 치러지고 A는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A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의사에 따라 국가가 운영되는 정치 체제를 뜻한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일은 이런 민주주의의 본질을 실현하는 몇 안되는 중요한 기회다. 이 가상의 사례에서 유권자들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대통령을 뽑았고 가장 많은 표를 얻은 A가 당선이 되었다. 그러므로 유권자의 의사나 여론이 선거 결과에 적절히 반영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까?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러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A가 "차기 대권주자"로 불리기 시작하는 때에 주목해 보자. 이 지점이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하다. A가 대권주자로서 적당한 사람인지, 적합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사람인지 유권자가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이 A는 대권주자로 미디어에 표현된다. 사람들은 미디어를 접하고서 A를 대권주자로 인식하게 된다. 이 순간, A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따라서 A가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대권 주자"로 불리는 순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가 "대권주자"로 불리는 순간, 그 "대권주자"라는 표현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어 그 내용을 스스로 실현시키려는 동력을 갖게 된다. 언어가 살아 움직이는 존재인 양, 스스로 일을 하는 마법을 부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거철이 되면 여론조사, 각 당의 경선, 공식 선거운동과 토론회, 지지율에 주목하고 이것들이 선거의 핵심 요소인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마법'의 힘을 고려한다면 '어떤 사람이 대권주자로 인식되지 않다가 "대권주자"로 묘사되기 시작하는 순간까지의 과정'도 선거에 매우 큰 영향력을 미치는 핵심적인 요소로 보아야 한다. 이 과정이 민주적이지 않다면 선거운동과 투표가 아무리 민주적이라 해도 그 선거는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과정을 소수의 사람들이 장악해 버렸다면, 그래서 모든 후보가 A와 같은 과정으로 대선 후보가 되었다면 우리는 투표를 통해 민주주의 '시늉'을 하게 될 뿐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와의 연관성을 살펴보자. A의 주변 사람들과 일부 언론은 처음부터 이 모든 일들을 기획했다(이들은 재단사들이다). 처음에 사람들은 TV에 나오는 A의 언행을 보고 'A는 대통령이 될 자격도 능력이 있는 걸까?'라고 미심쩍게 생각할 수 있다('내 눈에는 황제의 옷이 보이지 않는데?'). 그러나 이를 판단할 충분한 자료가 주어지지 않는다.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그리고 A가 언론을 통해 대권 주자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A를 대권 주자로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론이 유도하는 대세에 따른다('다들 황제의 행차를 보고 조용히 있으니 뭔가 있긴 있는건가 보다'). 여기서 대세는 A의 당선이 유력하다는 의미의 대세가 아니라 A가 대권주자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을 뜻한다. 여론조사 결과는 더 가관이다. A가 선두인 것으로 나온다(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황제의 옷이 너무 멋지다고 이야기한다). A가 대권주자로 묘사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강하게 반발할 사람들도 일부 있을 수 있다. 이들이 "황제폐하는 벌거벗었다"고 외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외침을 듣지 못 한다. 우리는 각자의 집에서 TV를 통해 황제의 행차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옆 집에서 누가 뭐라고 하는지, 꼬마가 뭐라고 외치는지 들을 수가 없다. 대신 우리는 TV에서 임금의 옷이 너무 멋지다면서 칭찬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A는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에는 지성도, 인성도, 경험도, 아무런 능력도 없다.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이 함량 미달, '0'에 가깝다. 즉, 투명한 옷처럼 실체도 없고 본질도 없다. 그러나 A는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실체가 없음에도 마치 있는 것처럼 시늉을 함으로써 정말로 옷이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버렸다. 포장이 내용물을 대체하고, 태도가 본질을 대체했다. 사람들은 누가 대권 주자로 불려도 좋은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리지 않은 채, 침묵으로써 이 사기극을 승인해주었다. 이런 면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동의한 적이 없는데도 동의한 것처럼 행동했다.
A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그가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TV에 보이는 A는 분명 대통령으로서는 벌거벗었다. 그러나 본인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한다. 주변 사람들과 언론은 그를 대통령으로 대우한다. 이들의 태도가 'A가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본질을 압도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기극을 아무런 의심 없이 진실로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들은 별 관심을 갖거나 생각을 하지 않고 A를 주어진 조건, 즉, 자신과는 크게 관련 없는 '대통령이라 불리는 사람'쯤으로 인식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조작이고 연기이며 A는 연출된 대통령임을 간파한다. 그러나 이들이 연대하여 A의 실체를 널리 알리고 시민들의 조직된 행동을 끌어내기도 쉽지는 않다. 대세는 유지된다. 그것이 흐름, 문맥이다. 시민들과 여론이 조직화되어 있지 않고 언론이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로 친밀하지 않고 사회가 개인화 되었을 경우, 그 사회는 사기(詐欺)와 기만(欺瞞)에 농락당하기 쉬워지며 조직과 사회의 비합리성이 커진다.
대중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피해자이다. 함량 미달의 대통령으로 인해 그들은 더 나은 대통령이 당선되었더라면 마땅히 누렸을 공동체의 발전과 성장, 더 나은 미래, 민주주의 발전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해자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A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은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만약 가해자가 아니라면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 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 했단 말인가? 그들은 금치산자인가?
생각을 좀더 확대해보자. 위 사례에서 '민주주의' 자체도 '투명한 옷'에 해당되지는 않는가? 사람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정말 민주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위 사례는 대통령에 관한 것이다. 국회의원은 어떤가? 지방의회 의원은? 시장, 군수는? A는 대통령이 되기 전 국회의원이었다. 많은 국회의원들은 지방의회 의원 출신이다. 이들이 민주적으로 뽑히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정치인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법을 만들고 고친다. 많은 사람들이 좀 덜 일하고 쉬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좀처럼 실현되지 않는다. 직장 내에서, 그리고 다른 사회 생활에서도 우리는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 하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일이 절대 다수가 원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사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민주주의적 가치가 거의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인 것처럼 시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가상의 사례에는 투명한 옷도 보이고 재단사들도 보인다. 동조하는 신하들과 침묵하는 대중들도 보인다. "구제불능의 멍청이"에 해당하는 호칭이 무엇인지는 추측이 된다. 그 호칭은 상식의 문제를 진영의 문제로 매도한다. 한편 차이점도 있다. 언론과 미디어가 개입되면서 좀더 복잡해지고 입체적으로 바뀌었다. 이제 단순히 꼬마의 외침 한 번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개인의 인식, 용기, 주체성에 대한 반성과 함께 여러 제도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여기서 "여러 제도"란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의사소통할 것인지에 관한 제도, 언론의 운영 방식에 관한 제도, 정당이 인력를 수급하는 방법에 관한 제도, 정당 내에서 리더가 선출되는 과정에 관한 제도, 민주주의를 더 잘 실현시킬 수 있는 선거 제도 등을 뜻한다.
단상들
- 대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 이것이 주류의 힘, 권력의 힘인 것 같다. 그런데 그 힘이 마냥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이 생각보다 허술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냥 몇 명이 모여 이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것도 같다. A가 대통령이 될 정도이니 위 사례에 나온 국가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얼마나 허술한가? 이럴 때마다 나는 '세상은 생각보다 허술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 위 사례에서는, 대통령의 자질에 관한 검증 시스템이 보이지 않는다. A의 당선은 한 국가의 지도자를 선출하는 과정 에서 검증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이렇게 부실한 시스템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현명한 왕자가 태어날지, 나라를 말아 먹을 왕자가 태어날지가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것보다 더 위험해 보인다.
- A가 대통령이 되어도 나라는 그럭저럭 굴러간다. 이는 시스템이 그래도 잘 갖추어져 있다는 반증인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반증인가?
- 대통령직에 요구되는 본질[자질]을 지닌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정당하고 정의롭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다. 이 부분은 마이클 샌댈의 <정의>를 읽어보면서 다시 생각해보기로 한다.
- A는 왜 대통령이 되려고 했을까? 별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많은 정치인들과 선거직 공직자들을 보았을 때, 그들이 공직에 나가려는 이유 중에는 개인적인 욕망이 있는 것 같다. 공공의 이익보다 개인적인 욕망이 더 큰 경우 공동체에는 비극이다. 이 부분도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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