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리스트
그들의경제우리들의경제학에 해당되는 글 1건
- 2016.02.28 『그들의 경제 우리들의 경제학』강신준
글
강신준 지음, 『그들의 경제 우리들의 경제학』, 도서출판 길, 2010.
어떤 꽃나무 씨앗 여러 개를 땅에 심었다. 새싹이 나고 자라는 모습을 보니 시들시들하고 잘 자라지 못한다. 나는 씨앗이 놓인 환경이 씨앗에게 그리 적합하지 않은지 염려한다. 일조량, 배수량, 거름의 양, 통풍의 여부 등이 그 식물에게 맞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새싹들 중에서도 어떤 것은 비교적 잘 자라고, 어떤 것은 상태가 좋지 않다. 나는 씨앗들 사이에도 각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삶에서 마주치는 어려움과 고통들도 ‘환경의 영향’과 ‘개인의 특성’이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나를 둘러싼 사회 제도와 환경이 나를 “이렇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같은 조건과 상황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 큰 문제에 부딪쳐 왔다면, 나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성이 그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둘 중의 하나로 문제의 원인을 몰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거의 언제나 환경과 개인적 특성, 두 가지가 모두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 같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환경과 개인적 특성이 만들어내는 관계, 이 둘의 결합이 이런저런 일들을 일으키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둘 중 어느 한 가지만을 문제라고 지적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는 시도들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어떤 사회문제를 사회제도 측면에서만 분석하고 논쟁하는 학문 분과나 이론가들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다. 또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고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일부 자기계발서도 나는 신뢰하지 잃는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당장 뚝딱 “해결책은 이겁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앞서 걸어 간 사람들이 한 이야기들을 듣고, 생각하고, 종합해보고, 새로운 생각을 짜내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려는 것이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나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이루는 사회제도[혹은 사회 체제]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 중에서도 나는 경제 제도에 대해 생각을 해 볼 때가 많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부분이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은 내 삶과 매우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나는 깨어 있는 시간 중 일하는 데에 가장 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곧, 일은 현재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하기 싫은 업무를 해야 하거나, 긴 시간 일을 해야 하거나, 업무의 강도가 셀 때, 나는 사는 것이 힘들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 ‘노동’은 이 사회에서 ‘경제’의 일부분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회제도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떤 점들이 잘못 되었는지, 어떤 부분들을 고쳐야 하는지 비판적으로 생각할 때 경제 분야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현대의 경제 제도를 우리는 자본주의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하곤 한다.
자본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체제이다. 첫째로 과거, 고대나 중세 등과 비교했을 때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특징짓는 체제이다. 두 번째로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미국과 한국에서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체제이다.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주목하게 되는 사람은 단연코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의 저작을 좀더 쉽게 접근해 보고자 집어 든 책이 『그들의 경제 우리들의 경제학』이다. 저자는 『자본』을 번역한 강신준 교수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대중들이 『자본』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해설서를 쓰고 싶어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6쪽). 지은이의 설명대로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다만,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본』을 읽은 누군가로부터 『자본』에 대해 전해 듣는 것과 같기 때문에, 어렵더라도 『자본』을 깊게 읽어 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책의 내용은 『자본』의 순서에 따라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주요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17세기 이전 유럽의 경제는 자신이 생산한 것을 소비하는 자급자족 체제였다. 생산과 소비가 통합되어 있었다. 따라서 열심히 일해서 많이 생산하는 것이 부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29쪽). 그러다가 전쟁과 역병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농토는 황폐화 되었다. 유럽은 필요한 물품을을 중국과 인도로부터 수입해야 했다. 이에 따라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고 교환이 이 둘을 중개하게 되었다(34~35쪽). 경제의 영역이 생산, 교환, 소비의 세 영역으로 분리된 것이다. “생산과 소비가 분리됨으로써 내가 수행하는 생산이 내가 소비하는 부와 분리되었고, 따라서 열심히 노동함으로써 생산을 늘린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소비로 이어지지 않게 되었으며 반대로 내가 소비하는 부가 나의 직접적인 노동과 무관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열심히 노동해도 부자가 될 수 없는 가능성과 함께 아무런 노동을 수행하지 않고도 막대한 부를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동시에 발생하였다(36쪽).” 상품의 가격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상품을 이동시킴으로써 부자가 될 수 있었으며 이를 연구하는 최초의 경제학인 중상주의 학파가 등장했다(37쪽). 그러나 이 방법도 교역이 확대되면서 상품의 가격차이가 점점 줄어들자 별로 재미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제 생산의 영역에서 부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처음에는 농업에서만 투입한 생산비 이상의 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를 중농주의라 부른다(38쪽).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중농주의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부는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력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경제학 체계를 따르는 학파를 고전파라고 부른다. 고전파 경제학은 생산에는 노동, 토지, 자본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세 생산요소가 투입되어 생산물이 만들어진다. 생산물이 판매되고 나면 그 수익은 다시 노동, 토지, 자본의 공급자들에게 분배된다. 부는 노동력으로부터 나오고, 노동력을 더 많이 투입하기 위해서는 생산시설이 더 늘어나야 한다. 생산시설이 늘어나기 위해서는 자본가가 자본을 더 많이 축적시켜야 한다는 것이 스미스의 생각이었다(39~41쪽).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자본가는 더 부자가 되고 또 더 소수가 되었으나, 노동자는 더 다수가 되고 더 가난해졌다. 이러한 분배를 불평등하고 부당한 것으로 보고 이를 바로잡고자 했던 대표적인 정치경제학자가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에서 자본주의란 생산과 소비가 분리된 경제 구조를 뜻한다(46쪽).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자본주의의 경제구조 중 상품의 생산에 관해 먼저 다룬다.
교환을 위해 생산된 물건을 상품이라고 부른다. 반면 자기 자신이나 가족이 사용하기 위해 물건을 만드는 것을 현물생산이라고 한다(54쪽). 자연스럽게, 자신과 가족들이 쓰고도 남는 물건들, 즉 잉여가 교환의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전에도 상품들의 교환이 미미하게 이루어졌지만 그 비중이 크게 작았다. 그러다가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생산력이 크게 늘어났고 “생산물의 대부분이 잉여가 되었다(55쪽).”
“사회 전체의 생산이 상품생산의 성격을 띠는 체제 - 그것을 우리는 자본주의(capitalism)이라고 부른다(55쪽).”
생산된 상품은 교환되어야 한다. 상품 자체를 쓸 때 느끼는 효용을 "사용가치"라고 한다. 따라서 상품의 종류에 따라 사용가치는 서로 다르다. 종류가 다른 상품 A와 상품 B가 교환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종류가 다르므로 A와 B의 사용가치는 다르다. 만약 사용가치가 같다면 같은 종류의 상품이므로 교환을 할 이유가 없다. A와 B가 교환된다는 것은 양쪽에 사용가치가 아닌, 동등한 양의 그 무엇이 들어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무엇을 마르크스는 ‘노동력의 양’으로 보았고, 이를 ‘가치’라고 불렀다(63쪽).
가치의 크기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교환되는 다른 상품으로 표현된다. 상품 A의 가치 크기는 상품 B로 표현된다. B의 가치 크기는 A로 표현된다. 수많은 상품의 가치 크기를 일반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상품, 오직 그 용도로만 쓰이기 위한 상품이 발명되었는데 이를 ‘화폐’라고 한다. 따라서 화폐에는 사용가치가 거의 없다(69~71쪽).
증식하는 화폐를 자본이라고 한다. 곧, 돈을 버는 돈이 자본이다(81쪽). 돈이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가? 싼 값에 상품 W를 사서 비싼 값에 팔면 돈의 양이 늘어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목적에 이용되는 상품 W를 찾아냈는데, 그것은 바로 ‘노동력’이었다(81~83쪽). 자본가는 적은 임금을 주고 노동자를 부려서 상품을 만든 후, 그 상품을 투입된 비용보다 비싼 값에 팔아 이윤을 얻고 자본을 늘린다.
이는 애초에 임금이 응당 받아야 하는 금액보다 적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응당 받아야 하는 금액과 실제 받은 임금의 차이를 ‘잉여가치’라고 한다(91쪽). 부를 늘리기 위해서는 잉여가치를 늘려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1. 같은 임금을 주고 일을 더 많이 시키거나, 2. 제품 한 개당 투입되는 노동시간을 줄임으로써, 곧 생산력을 증가시킴으로써 인건비를 낮추는 방법이 있다. 이 중 두 번째 방법은 생산 기술의 발전과 혁신을 의미한다. 그런데 생산 기술의 발전으로 제품당 투입되는 노동력이 줄어들면 자본가는 더 부유해지고 노동력은 “사용량이 계속 줄어드는 것이다. 당연히 시장에는 언제든지 남아 도는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게 되며 (…) 노동력의 가격은 점차 하락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조건은 더욱 유리해진다(117쪽).”
잉여가치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자본가는 노동자들이 적은 임금을 정당한 것,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어야 한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임금이 원자재 등 다른 생산요소처럼 시장에 의해 자연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임금은 다른 생산요소와는 달리 사회적 합의를 통해 결정되며 따라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변동될 수 있다(140~142쪽).
어느 한 기업이 기술 혁신을 통해 생산력을 증가시키면 그 기업은 제품 한 개당 투입되는 노동력을 줄일 수 있고 따라서 제품 한 개당 들어가는 인건비를 같은 제품을 만드는 경쟁 기업에 비해 절감시킬 수 있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생산력 증가로 더 많은 이윤을 얻는다. 이를 특별잉여가치라고 부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 기술 혁신이 모든 기업에 보급되면 그 산업의 모든 기업들에서 제품 한 개를 생산하는 데 드는 인건비의 비율이 같아진다. 이제, 제품에 포함된 노동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 제품 한 개당 잉여가치의 비율도 줄어든다. 즉, 기술 발전으로 이윤율이 하락하는 것이다(159~161쪽).
“그리고 이 특별잉여가치의 생산은 지속적으로 불변자본을 늘리고 가변자본을 줄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보았다. 이 경향은 두 가지 결과를 만들어낸다. 하나는 사회적 평균이윤율을 하락시키고 그것은 사회적으로 자본이 남아도는 현상을 만들어낸다. 투자를 통해 이윤을 만들어내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즉 과잉자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것이 노동력을 남아돌게 만드는 것이었다. 실업자가 갈수록 늘어나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즉 과잉인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과잉자본은 가치의 생산에 투하되는 자본이 계속 증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과잉인구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원천(쌀바위)인 노동력이 증가하지 못하고 따라서 생산되는 가치의 절대량이 늘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둘은 모두 가치의 생산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인 것이다(199쪽).”
생산된 상품은 소비자에게 판매되어야 그 존재의 이유를 실현한다. 즉, 생산된 가치는 판매를 통해 실현되어야 비로소 각각의 생산요소에게 소득이 돌아간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이 과정에도 장애가 발생한다. 자본가는 자신의 이윤을 모두 소비하지 않고 투자를 위해 쌓아두는 경향이 있다. 또한 생산기술의 발전으로 투입되는 노동력이 줄어드므로 노동자의 임금소득도 줄어든다. 따라서 만들어 놓은 물건은 갈수록 팔리지 않고 더 이상 생산의 증가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공황이다(200쪽). 이윤을 회수하지 못한 기업은 돈이 부족해지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더 많은 대출을 받으려 할 것이다. 금융권의 대출과 같은 신용의 팽창은 일시적으로는 이러한 상황을 해소하지만 결국은 자본의 덩치를 키움으로써 공황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201쪽). 기업은 대출 이자를 감당하기 위해 더 많은 이윤을 내려 할 것이고, 이에 따라 생산력을 더 늘리려 하고, 투입되는 노동력을 더 줄이려고 하며, 결국 이윤율은 더욱 하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한계는 자본이 잉여가치 생산을 포기하지 않는 한 제거될 수 없다(202쪽).”
케인즈는 유효수요를 창출하여 공황을 해소하려고 했다. “생산능력의 확대화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소비능력의 확대를 위해 임금소득을 일정하게 보장(208쪽)”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노동조합의 결성과 단체교섭, 파업권이 강화되었다(208쪽). 그러나 마르크스가 보기에 공황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이다.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해서는 과잉자본과 과잉인구를 사회가 흡수하여야 한다. 기업과 노동자를 사회가 흡수하는 것으로, 이를 생산의 사회화라고 한다(229쪽).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재화의 생산이 사회화된다는 것은 사람들의 욕망을 상당부분 사회가 충족시켜준다는 의미로, 복지사회가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27쪽). 생산의 사회화는 가치 실현의 문제(상품이 팔리지 않는 문제)도 해결한다. 노동자의 임금 중 “사회적으로 지급받는 부분이 점차 커져가고”(임금의 사회화) 임금소득을 증가시킨다(229쪽).
이러한 변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노동자들이 조직화되어야 하고(231쪽), “산업별 노동조합 이상의 조직단위로 편성되어” 임금의 사회화를 지향해야 한다(233쪽). 또한 노동자는 노동시간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생산을 사회화 한다는 것은 생산을 대중들이 통제한다는 뜻이고, 생산의 통제는 노동시간의 통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232쪽). 또한 임금소득의 증가는 노동시간의 단축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민주주의이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생산과 분배의 모든 경제영역에서 사회화의 확대를 통해 이루어지고 이는 오로지 민주주의의 확대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없이는 사회화가 이루어질 수 없고 사회화라는 과정이 없는 사회주의는 달성되지 않는다(235쪽).” 그리고 “많은 장애 요인과 조건이 따르는 이행과정은 힘들고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일 수 있으며 그것은 충분히 예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236쪽).”
내가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생산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생산 수단을 일부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이 없으므로 나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본 내가 일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고대에 노예로 태어난 사람이 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듯이 나 또한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일정 부분 역사적인 숙명이기도 한 것 같다. 중세시대의 농노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많은 시간을 일한다는, 저자가 다른 곳에서 했던 언급도 생각이 난다. 그렇다. 우리는 노예의 후예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시민혁명과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과 역사의 발전에 대해 배우면서 나는 신분제에 예속되었던 과거의 사람들에게 연민의 시선을 던졌었다. 그러면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그들과는 다른, 자유롭고 평등하고 더 발달한,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그 느낌은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대의 노예도 일을 하다가 죽었고 우리도 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다.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근로자의 근무시간은 OECD 회원국 중 1, 2위를 다툰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주요한 수단이다(232쪽).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국가에 살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해야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을까? 우리의 노조는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나? 우리의 정치가 이러한 역할을 하게 할 수는 없는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나는 본질적으로 실업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시대,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 대체할 다른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나는 불리한 근로조건이나 긴 노동시간, 혹은 내키지 않는 업무를 감내해야만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조직화되어야 하며, 이 변화는 천천히 이루어지며, 길고도 힘든 과정이라고 한다(234쪽). 그렇다면 나는 좀더 느긋해져야 한다. 그리고 혼자여서는 안 된다.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며 사람들이 함께 가는 것을 도와야 한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유화만이 문제일까? 내가 경험한 바로는 같은 근로자들 사이의 관계도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한 기업에서 같이 근무하더라도 중간 관리자와 말단 직원의 입장은 상당히 다르다.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상사가 그다지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도 많은 일을 하는 말단 직원보다 훨씬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면 이 역시 착취라고 볼 수 있다. 고위 근로자의 보수화와 권력화는 그 아래층의 근로자에게 큰 부담이 된다. 근로자 사이의 불평등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적 대우에서도 볼 수 있다. 거의 비슷한 일을 하는데도 한 쪽은 훨씬 낮은 임금을 받고 고용도 보장받지 못한다. 이 역시 착취라고 불러야 한다. 그렇다면 이 착취는 누가 누구를 착취하는 것인가? 자본가가 비정규직을 착취하는 것일 뿐인가?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은 아닌가? 만약 정규직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이나 근로시간을 양보하여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데 합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생산의 사회화”로 가기 이전에 우리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
자본주의는 상당히 모순적인 체제이다. 돈으로 돈을 벌려는 시도가 돈으로 돈을 벌 수 없게 만든다. 돈을 벌려는 자본의 운행이 스스로를 옥죄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이러한 경험들을 곧잘 한다. 가장 좋은 예는 운동이다. 어떤 운동이든지 처음 배울 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불필요한 힘을 빼라는 이야기다. 나는 테니스를 배운 적이 있다. 신기하게도 공을 강하게 치기 위해 공을 치는 순간 라켓을 쥔 팔에 힘을 주면 오히려 공의 위력은 줄어든다. 내가 준 힘이 팔의 유연성과 라켓의 속도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을 세게 치기 위해서는 힘을 많이 주어야 한다는 나의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자본가의 인식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스스로 깨우치지 못한다면 옆에서 코치가 알려주듯, 누군가가 그에게 조언을 해줄 필요가 있다. 조언의 내용은 “공존하지 못하면 자멸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돈을 더 벌려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조건이 붙는다. 돈을 “나만” 벌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증식하고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자본의 운동 원리이다. 그렇다면 자본가의 재산을 모두 몰수해서 사회에 환원시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생산이 사회화된 경우에도 사람들이 모인 조직 내에서는 위계나 차이가 생길 것이고, 따라서 기득권을 더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생길 수 있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더욱 강화하려는 행동을 계속한다면 불평등은 다시 심화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든 폐해는 자본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만약 당신에게 자본가가 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아파트를 포함한 부동산 가격을 보자. 이 부동산 가격은 수많은 사람들이 투기를 한 결과이고, 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자본가가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나는 자본가만이 자본주의를 유지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의 본성은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으로부터 나왔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자본가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남이야 어떻든 나만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모두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유지시키고 있는 체제이다. 그러므로 나만 돈을 벌면 된다는 생각, 자신만 부자가 되면 된다는 생각을 바꾸는 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그럴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죽는다. 과로사 하는 사람들도 있고 산업 재해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일들의 가장 큰 책임은 고용주가 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모 전자의 공장에서 일하던 젊은 직원이 백혈병에 걸렸던 사건을 신문 기사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 회사의 사측이 보인 태도는 인간으로서의 선을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거기에다 대고 도덕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저자는 마르크스의 지향점이 복지사회와 유사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마르크스의 저작을 직접 읽어 보기 전까지는 여기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나 나 역시 우리 사회가 북유럽과 같은 복지사회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그래서 나와 내 주변 사람들, 그리고 우리 후대의 사람들이 좀더 평화롭고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좀더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현재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과학적인 주장과 근거를 제시한 마르크스가 상당히 인간적이고 유능한 학자였다고 생각한다.
단상들
1.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상품을 판매하여 받은 금액 중에서 임금이나 각종 비용을 제외하고 자본가가 가져가는 금액을 잉여가치라고 불렀다. 원래 노동자에게 지불되어야 할 임금을 적게 지불하고 남은 금액이라는 의미이다. 근로자의 근로가치는 상품이 판매될 때에는 정당하게 평가되지만, 임금을 지급할 때에는 과소평가된다는 것이 잉여가치 개념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전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상품이 시장에서 판매될 때 정해지는 가격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제를 부인하면 다른 방식의 논의도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보자.
한 자본가가 상품 A를 만들어 한 개당 140원에 판다. A를 한 개 만드는 데 드는 원재료비 등의 블뱐자본은 40원이다. 그리고 한 개당 지출되는 인건비는 60원이다. 다라서 자본가는 자신의 이윤으로 40원을 챙겨간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가가 챙겨가는 40원은 노동자로부터 착취한 것이다. 애초에 그 상품에는 140원만큼의 가치가 있었고, 고정자본에 든 비용 40원을 제외한 80원은 노동자가 만든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가능하려면 그 상품의 시장 가격이 140원이라는 사실이 ‘정당해야’ 한다. 그 상품의 정당한 가격이 100원이라면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도 있다.
한 자본가가 원래는 100원만큼의 가치를 갖는 상품 A를 만들어 판다. 자본가는 재료비로 40원, 인건비로 60원을 지출한다. 그러나 그 자본가는 어떻게어떻게 해서 그 상품을 140원에 판매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래서 얻은 이윤 40원을 자신이 가져간다. 노동자는 자신이 60원을 받은 것에 대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소비자이다. 소비자는 원래 100원 정도의 가치밖에 없던 물건을 140원을 주고 구입했다. 소비자가 이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저항할 수 없다면 자본가는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를 착취한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는 마케팅, 광고, 독과점기업, 기업들 간의 담합, 그리고 군중심리로 인해 '상품의 가격을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개에 천 만원 하는 명품 가방이 있다. 이 가방을 만드는 회사의 경영자는 재료비로 100만원, 인건비로 200만원을 쓰고 700만월을 이윤으로 챙겼다. 이 700만원 또한 근로자에게 지급되어야 마땅하다고 보아야 할까? 근로자가 700만원만큼 착취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경영자의 이윤까지 합쳐서 400만원 정도면 정당한, 혹은 적당한 가격이었을 가방을 1000만원에 구입한 소비자가 600만원 만큼 착취, 혹은 사기를 당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는 노동자로서의 대중이 착취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장가격이 조작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소비자로서의 대중도 착취당할 수 있다. 기업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임금을 깎으려는 노력과 더불어 엄청난 마케팅 비용을 들여서 상품 자체의 가격을 높이려는 노력 또한 기울이는 것을 보라.
같은 현상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위에서 예를 든 사례에서 판매 된 상품이 명품 가방이 아니라 생필품이라면, 근로자는 정당한 가격보다 높은 가격이 책정된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더 많은 임금을 받아야 마땅하다. 즉, 전반적인 물가가 임금에 비해 너무 비싼 상황이라면, 근로자에게 줄 임금을 적게 주는 데서 잉여가치가 생겼다는 설명도 적합해 보인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노동력을 제공할 때에도 신중해야 하며, 상품을 구매할 때에도 신중해야만 한다. 착취당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2.
위의 사례를 지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한 자본가가 원목을 사다가 노동자를 시켜 가구를 만들어 팔았다. 자본가는 역시 재료비로 60원, 인건비로 40원을 지출하고 가구를 140원에 팔아 40원의 이윤을 얻었다. 인건비 40원이 정당한 것이었다고 치자. 시장가격 140원도 정당한 것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이번에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재료비 60원이 잘못된 것이다. 재료비 60원이 너무 싸다는 것이다. 지구의 입장에서는 원래 있던 나무를 인간이 마음대로 베어갔으므로, 그 자리에 다시 나무를 심어서 원래 있던 크기로 키우는 대까지 드는 비용을 지구에게 지불했었어야 옳다. 만약 그 회사로 인해 어떤 지역의 살림이 파괴된 후 원래의 상태로 복구되지 않았다면 자본가는 재료비를 너무나 적게 지불한 것이 된다. 현재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살림 파괴, 지구 온난화와 기상 이변, 그리고 해수의 방사능 오염 등을 생각해보라. 인류가 천연자원에 대해, 자연에 대해 마땅한 값을 치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 논의를 좀더 확대해보자. 왜 현대에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암으로 목숨을 잃는가? 우리가 먹는 음식과 살고 있는 환경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파괴되고 있는 것에는 자연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도 포함된다.
나는 경제성장률 몇 %라는 식의 논의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경제성장률에는 그만큼의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된 것들, 환경오염과 자연파괴, 그로 인한 사망률의 증가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또한 노동을 하느라 써버린 우리의 소중한 시간인, 삶의 가치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이런 것들을 온전히 다 경제성장률에 반영한다면 그 수치는 0이거나 혹은 마이너스가 될는지도 모른다. 경제성장률이 진실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더 많이 '소비하였다'는 것뿐이다.
3.
상품은 곧 잉여다. 잉여란 나에게는 필요치 않는 물건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그 물건을 필요로 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필요’를 생산해야만 한다. 필요, 곧 욕망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 욕망에 대해 마르크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나는 말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춘의 끝자락에서 (0) | 2017.08.20 |
---|---|
동의와 문맥 (0) | 2017.07.28 |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0) | 2016.02.21 |
『회복탄력성』 김주환 (0) | 2015.04.05 |
생존의 띠 (0) | 2014.09.09 |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