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와 문맥
나의 삶은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사실, 나는 내가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줄에 묶인 개나 혹은 감옥에 갇힌 수인이 된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나는 민주주의 공화국의 자유 시민 아니던가? 왜 이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인가? 그 원인을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동의한 적이 없는데 동의한 것처럼 행동한다. 그 괴리를 메우고 있는 것이 문맥(context)이다.
"문맥"이란 단어는 신영복 선생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나는 여기서 문맥을 '집단을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행동을 함으로써 만들어지는 흐름'의 의미로 썼다. 문맥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될 수 있다. 대세, 유행, 회사에서의 집단적인 상사 눈치보기, 왕따에 동조하기, 내가 소속된 집단에서 분위기상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경우 등. 강제는 아니지만 개인이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문맥이라는 단어를 썼다.
이런 흐름, 또는 문맥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가? 대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러한 흐름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 같은 것이 있나? 역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행동을 하는 경우는 많다. 그런데 그 각각의 개인들에게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고 물어본다면 명확히 답을 못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 중에는 "무엇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고 확고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동의를 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잘 모르겠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니까"라고 답을 할 때가 많을 것이다. 아니면 "무엇 때문에"이라는 이유에 어느정도 동의를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행동을 100%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느끼기도 한다. 세상은 생각보다 허술한 것 같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소수의 사람이 의도한 대로 형성되거나, 별 이유없이 형성되기도 하거나,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뜻밖의 요인들 때문에 형성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특히 한국 사회에서 심한 것 같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의 왕따 현상을 생각해보자. 어떤 학생이 왕따가 되는 것은 필연적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특정한 계기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계기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도 있다. 또,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고 해도 학생들 개개인마다 그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다. 어떤 아이가 몸에서 냄새가 났다. 짓궂은 아이들이 그것을 빌미 삼아 그를 왕따시키기로 결정했다고 하자.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그 결정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그 반의 아이들 중에는 '그런 이유로 친구를 따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상황이라면, 그를 따돌리지 않는 몇몇 아이들이 거의 언제나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상당하다. 아이들은 자신의 판단과는 상관없이 왕따 현상에 동조하게 된다. 왜 그럴까? 동조하는 것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대세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경우, 대중의 눈에 띄게 되고, 오히려 내가 왕따가 되거나 다른 피해를 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별 득도 없이 다수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소외되고 싶지는 않다. 대세에 복종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그래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동의한 것처럼 행동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산다. 그런데 대부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 왜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을 계속하느냐고 묻는다면 일부는 확신에 차서 "돈을 벌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계유지"가 일을 계속하는 이유의 100%를 설명해줄까? 아닌 것 같다. 일을 하는 이유 중에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백수로 살 수는 없으니까," "다른 시도를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니까," "이미 변화를 시도하기엔 나이가 많아져서," 또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도 왜 이렇게 사는지 잘 모르겠다"등의 이유들이 뒤섞여 있는 것 같다. 나는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라는 이유가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그들의 행동을 보면서, 그들의 행동이 자신의 셍각이나 판단의 결과가 아닌 경우가 참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자기 행동의 이유로 삼곤 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내 행동의 이유가 된다. 그런데 그 다른 사람들 중 한 명에게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역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것은 순환논증이다. 우리는 계속 돌아가는 쳇바퀴 위에 있다. 도대체 최초의 시작점은 어디인가? 이런 구조는 누가 만들었나? 우리가 동의를 하기는 했던가? 다수가 원한 것인가? 아니면 소수의 누군가가 의도한 것인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결과인가? 이렇게 된 이유는 뭔가?
법, 윤리, 도덕, 사회 제도처럼 규범으로서 명확하게 정립된 것들이 아닌, 분위기나 흐름, 때로는 관습 같이 느슨하고 연약해 보이는 것들도 우리의 행동을 제한한다. 때로는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노예가 된 것 같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또, '개인들이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개별적인 상황에서는 우리사회가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사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런 것들이 지배의 수단이나 권력의 행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맥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를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지 인식한다면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의 주권과 잠재력을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든 역사적, 제도적, 환경적 요인들이 있을 수 있다.